등록 : 2019.10.29 18:00
수정 : 2019.10.30 13:11
조혜정
사회정책팀 데스크
윤도현의 팬이었다. 통기타를 메고 ‘타잔’이라는 희한한 노래를 부르는 더벅머리 오빠의 목소리에 속이 뻥 뚫렸다. 피시(PC)통신 팬클럽 ‘타잔마을’에 가입했고, 그의 주연 영화 <정글 스토리>의 테이프가 늘어지도록 돌려봤다. ‘윤도현 밴드’로 거듭난 2집을 발표하면서 그는 1년 동안 매달 한 차례씩 공연을 열었는데, 나는 그 공연에 단 한 차례도 빠지지 않았다. ‘록 스피릿’ 충만한 2집 노래들은 팬클럽 회원 특전으로 예매한 앞자리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첫 곡이 시작되면 죄다 무대 아래로 달려가 헤드뱅잉 파티를 벌였으니 말이다.
땀으로 샤워를 하는 두 시간여 끝에 팬들이 외치는 앙코르 요청에서 빠지지 않는 노래가 ‘이 땅에 살기 위하여’였다. 박노해가 1993년 발표한 시에 윤도현이 곡을 붙인 이 노래는, 강하게 몰아치는 앞부분 랩과 폭발적인 목소리가 귀를 빨아들이는 뒷부분 멜로디에 강렬한 기타·드럼 연주가 더해져, 심장 박동수를 최고조로 끌어올리는 앙코르곡으로 더할 나위 없었다. 노동법 날치기에 이어진 총파업으로 시작해 외환위기로 끝난 1997년의 풍경을 그려내는 데도 이만한 노래는 없었던 것 같다.
윤도현이 더는 ‘나만 아는 가수’가 아니게 되고, 덕질도 시들해지면서 잊었던 그 노래가 다시 떠오른 건 한국도로공사(도공) 톨게이트 요금 수납원들의 서울톨게이트 지붕 점거농성 때문이었다. “이 땅에 발 딛고 설 자유조차 빼앗겨/ 지상 수십 미터 아찔한 고공농성”을 벌이는 모습을, 공연장에서 22년이나 흐른 뒤에 내 눈으로 지켜보게 될 줄이야.
고공농성자들은 97일 만에 땅으로 내려왔다. 하지만 ‘직접 고용되려면 법원에서 한 번이라도 불법파견 판결을 받고 오라’고 버티는 도공 탓에, 이들을 포함한 요금 수납원들은 ‘이 땅에 살기 위하여’ 여전히 경북 김천 도공 본사에서 처절한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서울고등법원이 요금 수납원 김아무개씨 등 2명이 낸 근로자지위 보전 가처분을 받아들인 다음 날인 24일, 도공이 낸 보도자료에 헛웃음이 터졌다. 도공은 김씨 등이 불법파견 여부를 다투는 근로자지위 확인 소송 2심 계류자여서 근로자지위가 임시로 인정된 것이라며, “도공이 지난 9일 (더불어민주당) 을지로위원회의 중재로 한국노총 소속 톨게이트노조와 합의한 ‘2심 계류 수납원은 직접 고용한다’는 내용과 같은 맥락”이라고 주장했다. 또 이 합의안이 “민주노총 소속 조합원을 포함한 자회사 전환 비동의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고 밝혔다.
하지만 고법 결정문의 핵심은 ‘2심 계류’가 아니라, ‘요금 수납원마다 고용조건 등이 다르므로 개별적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도공의 주장을 대법원이 이미 기각하고 불법파견을 폭넓게 인정했다는 점이다. 게다가 고법은, “채권자들(김씨 등)이 소속된 노조(민주노총)와 채무자(도공) 사이에 교섭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며 톨게이트노조와 한 합의를 민주노총 조합원에게 적용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렇다면 도공의 보도자료는 ‘시험 봐서 공정하게 들어간 정규직’의 문해력 탓에 생긴 사고인가, 이강래 사장의 버티기 탓에 나온 오기인가.
을지로위원회가 이강래 사장과 도공의 기세를 꺾지 못한 것도 의문점이다. 정치의 기능인 갈등 조정과 타협이, 양쪽 힘의 크기나 주장의 옳고 그름, 선례로 남을 결과가 미칠 파장 등을 고려하지 않은 채 계량적으로 딱 1만큼씩 물러서도록 하는 것이라 생각했던 것일까?
“찬 시멘트 바닥에 스티로폴 깔고/ 가면 얼마나 가겠나 시작한 농성/ 삼백일 넘어 쉬어 터진 몸부림에도 대답 하나 없는” 농성은 대한민국에 널리고 널렸다. 요금 수납원 직접고용은, 이렇게 길바닥에 버려진 노동자들이 이 땅의 주인임을 확인하는 가늠자다. “우리가 태어나고 자라온 이 땅/ 우리의 노동으로 일터 세운 이 땅에/ 사람으로 살기 위하여 사랑으로 살기 위하여/(중략)/ 이 땅의 주인으로 살기 위하여/ 이 땅의 주인으로 살기 위하여”. z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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