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10.22 17:53
수정 : 2019.10.23 02:07
조국 사태가 끝났다. 정유라의 이화여대 입시 부정이 드러났을 때나, 조국 교수의 딸 관련 의혹이 불거졌을 때나, 대학입시에 관계된 부정이나 의혹이 우리 사회에서 거의 정권의 운명을 좌우할 만큼 격렬한 동요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은 당사자의 불행이기 전에 우리 사회 전체의 비극이다. 도대체 대학이 무엇이기에 연간 독서량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에 미치지 못하는 나라에서 대학입시가 그리도 중요한 국가적 관심사가 된 것일까?
이유는 다 아는 대로, 출신 학벌이 신분인 나라에서 어느 대학을 나왔느냐 하는 것이 삶의 질에 너무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대학을 나오지 않은 경우는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러니까 모두가 대학입시에 목을 매고 조금이라도 더 높은 서열의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경쟁하게 된다. 그리고 거기서 모든 입시경쟁의 지옥도가 그려지는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대학을 평준화하는 수밖에 없다. 대학의 서열을 그대로 두면서 박정희처럼 중·고등학교만 평준화시키는 것이나, 그 이후 여러 정부를 거치면서 진행된 대입제도의 개선은 문제 해결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대학 서열이 엄존하는 한 더 높은 서열의 대학에 입학하기 위한 경쟁이 그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독일처럼 모든 대학이 평준화되지 못하더라도 지금처럼 뾰족한 예각삼각형 모양의 서열체제가 넓적한 사다리꼴로 바뀌기만 해도 입시경쟁의 압력은 현저히 줄어들 것이다. 그러면 특정 대학에 입학하기 위한 입시경쟁은 하고 싶어도 할 이유가 없어질 것이므로 저절로 사교육 걱정 없는 세상이 될 것이다. 조국 사태로 대통령이 입시제도 전반에 대한 개선책을 주문했다 하지만 대학 평준화 없는 입시제도 개선은 또 다른 혼란을 불러올 뿐이다.
이렇게 말하면 많은 사람이 대학의 하향 평준화를 염려한다. 하지만 만약 당신이 대학교수라면 모든 과목에 1등급 받고 입학해서 고시공부 하겠다는 학생을 제자로 삼고 싶겠는가, 아니면 모든 과목에 4등급 받고 논문도 상장도 없지만 정말로 대학에서 그 학문을 공부하고 싶다는 학생을 뽑고 싶겠는가? “아는 사람이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이 즐기는 사람만 못하다”(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는 공자의 말처럼, 당장은 아는 것이 좀 모자라더라도 학문을 좋아하고 즐기는 학생들이 대학에 들어오는 것이 학문의 발전을 위해 훨씬 더 좋은 일이다. 하지만 현재의 한국 교육은 이런 소박한 상식을 거스를 수밖에 없도록 구조화되어 있다. 학생들은 학문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시험 성적에 따라 조금이라도 학벌 서열이 높은 대학과 학과를 선택하고, 대학은 대학대로 성적이 높은 학생만 선발하려 한다. 그 결과 모든 대학이 하향 평준화의 길을 걷게 된다.
대학은 전문적인 학자를 길러내기 위해 존재하는 기관이지, 교양인을 기르라고 있는 기관이 아니다. 학부 강의실에 아무리 수재들이 모여 있다 하더라도 그들이 학문에 관심이 없고 단지 특정 대학의 학벌을 얻기 위해 대학에 들어와서 취업시험 준비나 하다가 학사학위만 받고 졸업한다면, 그런 대학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다. 나라와 시대마다 학제가 달라 일률적으로 말하기 어려우므로 독일의 경우를 두고 보자면 내가 유학했던 1980년대에는 대학의 졸업학위는 우리 기준으로 석사나 박사밖에 없었다. 그 석사학위도 대학이 대중화되면서 생긴 것이지 그 전에는 독일 대학의 졸업학위가 지금 우리의 박사였다.
그런 독일에서도 근래에 들어서는 유럽연합(EU) 차원에서 학제를 통일한다 해서 학사과정이 생기기는 했으나, 학사과정이 대학의 중심은 아니다. 학생 입장에서는 학사학위 받아서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고 대학 입장에서도 학사과정의 기초 교육이 대학의 존재 이유는 아니기 때문이다. 하버드대라도 학부 4년 과정을 통해 어떤 분야의 전문가나 학자를 만들지는 못한다. 어디서나 학자와 전문가를 만드는 것은 대학원 교육이다. 학부의 교육이 상위의 대학원 교육으로 이어지는 준비 과정이 아니라면 굳이 애지중지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금까지 대학이라고 하면 대학원이 아니라 학부를 먼저 생각하고, 정작 박사를 양성하는 대학원 교육은 푸대접하면서, 학문 후속세대의 양성을 외국 대학에 맡겨왔다. 2017년 서울대 다양성위원회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16년 서울대 전임교수들 가운데 의·치대를 제외한 나머지 분야의 경우 외국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교수의 비율이 76%였다. 현실이 이러하니 많은 학생이 박사학위를 얻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유학길에 오른다. 하지만 의대나 치대는 교수진 대부분이 국내 박사고, 학생들을 유학 보내지 않고서도 최고 수준의 의학 연구와 교육을 하고 있다. 다른 분야라고 그렇게 하지 못할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최근 일본의 수출규제 덕분에 기술 자립에 대한 관심이 부쩍 많아졌는데, 기술 자립을 위해서라도 학문의 자립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다.
이를 위해서는 이제 국가의 고등교육정책이 학부가 아니라 대학원 중심으로 바뀌어야 한다. 이것은 학문의 발전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입시지옥의 해소를 위해서도 긴요하다. 권력은 독점을 추구하지만 학문은 분산이 생명이다. 다양성 속에서만 창조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부의 고등교육정책이 대학원 육성 중심으로 바뀌면 자연히 학부의 서열체제에도 균열이 생기게 마련이다. 이를 위해 대학원생과 학문 후속세대에 대한 체계적인 지원을 제도화하는 것이 시급하다. 예를 들어 교수 한명당 3~5명의 박사과정 학생에게 학비와 생활비를 보장하는 장학금을 줄 수 있을 정도의 지원이 이루어진다면, 학문의 육성과 학벌의 분산을 동시에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대학의 학부과정에 대한 교육정책은 그것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는 냉정한 전제에서 출발해야 한다. 수능시험을 네댓 등급의 자격 고사로 바꾸어 전 과목 1등급이 수만명씩 나오게 만들어야 한다. 시험의 변별력이 없어지면, 대학도 고등학교도 우수 학생 타령을 하지 않게 된다. 수험생들에게는 지원 학과를 서너군데 신청하게 해서 특정 대학 학과에 지원자가 몰리는 경우에는 정부에서 일괄적으로 추첨해서 배정하면 된다. 그러면 위에서부터 대학이 평준화되기 시작할 것이다.
그런 바탕 위에서 학생들이 굳이 대학에 오지 않아도 좋을 조건을 만들어나가야 한다. 대부분의 직업이 대학 교육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일반 공무원 시험은 고등학교 졸업자들만 응시하게 해야 사회적 낭비를 줄일 수 있다. 그리고 특성화고등학교 및 전문대학이 제구실을 다하도록 더 적극적으로 지원해야 한다. 교육이 직업과 연계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보자면 예전처럼 상고 졸업하고 은행이나 일반 기업에 취업하는 것이 지금처럼 대학 졸업하고 과거와 비슷한 직장에 취업하는 것보다 개인이나 사회를 위해 훨씬 더 생산적이다. 세상은 늘 변한다. 좋은 것이 나빠진다면, 나쁜 것도 좋아질 수 있다. 그러니 두려워 말고 바꾸자. 더 늦기 전에.
김상봉
전남대 철학과 교수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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