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10.22 17:52
수정 : 2019.10.23 13:57
최우리
법조팀 기자
수습기자 때 일이다. 새벽부터 밤까지 경찰서를 돌며 한 조각의 사실이라도 더 듣기를 간절히 바랐던 수습기자들 중에 한 여성 기자가 있었다. 그는 듣고 묻고 쓰는 기자의 일이 잘 맞는 것 같았다. 그는 다른 기자들이 알지 못하는 사실의 조각들을 찾아 여러 단독 기사를 썼다.
그러던 중 그에 대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그가 경찰서에 치마를 입고 다닌다는 것이었다. 말의 행간에는 그가 치마를 입고 나타나 경찰의 마음을 사 더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는 뜻이 깔려 있었다. 그보다 단독 기사를 쓰지 못하는 기자들이 자신들의 열등감을 숨기려 퍼뜨린 말이었을 가능성이 컸지만, 그 말은 한동안 기자들 입에 오르내렸다.
기자의 취재 활동은 넓게 보면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이다. 속마음을 얘기하지 않으려는 취재원에게 기자를 믿고 말을 해달라고 하기 위해서는 기자가 가진 모든 것을 쏟아부어 취재원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 그 한마디를 더 듣기 위해 기자들마다 각자의 무기를 개발한다. 학연, 지연 등 각종 인연 팔이를 하는 것은 기본이고, 친절함, 유쾌함, 똑똑함 등 각자 성격에 맞는 여러 취재 방법을 개발하고 취재 현장마다 적절하게 적용한다. 모든 직업에서 그러하겠지만, 기자 일도 기자의 생각과 언행 등 모든 것이 취재 수단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 일을 잘하려면 꾸준히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노력한다고 해도 여성 기자가 남성 취재원의 마음을 얻는 일이 쉽지 않을 때가 있다. 남성 중심적인 출입처에서 특히 그렇다. 예를 들어 저녁 자리가 끝난 뒤 2차로 자리를 옮기면서 남성 취재원이 여성 기자에게 먼저 돌아가라고 권유할 때가 있다. 남성끼리만 갈 곳이 있다는 의미다. 그때 여성 기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이 가겠다고 주장할 것인지, 조용히 빠져야 하는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여성 기자를 기자로서가 아닌 여성이라고 먼저 인식하는 취재원 앞에서 어떤 태도를 보여야 적당한지, 남성 기자라면 하지 않을 고민을 한다는 것은 꽤나 짜증나는 일이다.
더욱 화가 나는 일은, 여성 수습기자의 단독 기사가 그의 취재력이 아닌 치마 때문이라고 믿고 싶은 것처럼, 여성을 평가하면서 능력 이외의 다른 이유를 드는 경우다. 유시민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이사장이 진행하는 유튜브 방송 ‘알릴레오’에서 장용진 <아주경제> 기자가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수사를 취재하는 <한국방송>(KBS) 여성 기자를 가리켜 “그 기자를 좋아하는 검사들이 많아서 수사 내용을 많이 흘렸다”, “검사가 다른 마음이 있었는지는 모르겠고 많이 친밀한 관계가 있었다”고 말했다. 성차별적 인식을 바탕으로 여성 기자의 능력을 폄훼한 것이다.
취재원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점은 동료 기자로서 높게 평가할 일이지 성적 상상을 더해 희롱할 일이 아니다. 장 기자는 여성 기자가 남성 중심적인 취재 환경에서 어떤 고민과 노력을 하고 있는지 잘 알지 못하는 것 같다. 한국여기자협회는 장 기자 등이 “모든 여성 직업인의 인권과 명예를 훼손했다”고 비판했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사태는 깊고 넓게 한국 사회를 할퀴어 감춰진 속살을 드러내고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알릴레오’ 성희롱 발언을 포함해 여성 직업인에 대한 우리 사회의 차별적·폭력적 인식이 아직 여전하다는 것이다. 검찰이 조 장관 집을 압수수색할 때 식사를 배달한 식당 직원을 취재했던 여성 기자들을 향한 인신공격성 댓글이나, 압수수색 현장에 나간 김아무개 서울중앙지검 여성 검사와 가족에 대한 신상 털기도 비슷한 맥락이다. 검찰 수사의 정당성을 논하는 문제와는 별개로 여성 기자나 여성 검사 모두 자신의 일을 했을 뿐이지만, 일부 시민들은 그들이 주어진 일을 하고 있는 직업인이었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았다. 이 모든 일은 여성을 동료로, 직업인으로 보았다면 일어나지 않을 일들이다.
ecowo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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