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대 통일통합연구원 교수 민족 최대의 명절 추석은 북한에서 ‘민속명절’로 불린다. 우리처럼 민족의 대이동과 같은 교통체증이 없고 성묘객도 많지 않다. 하지만 남북 모두 삼국시대부터 전해져온 민족의 명절을 여전히 중요하게 쇠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남북 분단 74년으로 인해 추석의 풍경은 조금씩 다르더라도 풍요롭고 정겨운 한가위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마음은 같다. 고향에서 보냈던 추석은 요란하지는 않았지만 자주 볼 수 없었던 친척들을 만나는 풍성한 기쁨이 컸다. 어릴 적 사촌 형들이 이끈 시냇가에서 고기잡이와 밤 따기, 사촌 누나들이 챙겨주는 작지만 의미있는 선물들은 다음 해 추석을 기다리게 하는 농밀한 추억이 된다. 성묘길에 매번 샛길로 새는 일이 다반사였고 그 추궁은 오롯이 사촌 형 누나들의 몫이지만 제사가 끝나면 둘러앉아 음식을 나누며 서로의 화목을 도모했던 정겨움과 넉넉함은 지금도 어제인 듯 선명하다. 군 시절 비무장지대 북쪽에서 맞던 추석은 또 다른 피상적 관찰로서의 경험이다. 정전협정 이전까지 마을이었던 비무장지대(DMZ) 지역에 있던 조상의 묘소를 미처 옮기지 못한 개성 주민들도 있었다. 어느 추석날 생면부지의 민간인이 비무장지대로 들어가는 선임병을 붙들고 건넸다는 술병에는 비무장지대 어디엔가 묻혀 있는 조상의 무덤에 술 한잔 올리려 했던 자손의 마음이 담겨 있었다. 남겨진 술을 나누어 마시는 우리네 기분도 심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추석에 보는 남쪽 지역은 색다른 풍경이다. 크리스마스 때는 국군 감시초소(GP)에 설치된 트리 속에서 흘러나오는 캐럴이, 설날에는 화려한 조명으로 둘러싼 전광판이 이색적이라면, 추석에는 ‘자유로’를 오가는 자동차들이 장관이다. 평소 가깝게 지내던 정치장교에게 자유로를 달리는 많은 자동차에 대해 질문한 적이 있다. 그는 남조선의 모든 고속도로는 자유로를 통해서만 진입할 수 있기에 많아 보이는 것이라고 했는데, 추석날 자유로의 교통체증은 더 부연설명이 필요 없었다. 그 자유로 끝에 있는 임진각은 한국으로 온 뒤 단골로 찾는 곳이다. 처음 몇해 동안은 고향을 바라보며 망향제를 지내는 이산가족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임진각에서 추석날에 마주치던 수많은 이산가족이 놀랍게도 10년이 흐른 지금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1988년부터 상봉을 신청한 이산가족 13만3306명 가운데 7만9466명이 한을 풀지 못한 채 운명했다. 안타까운 건 생존자 5만3887명 중 86%가 70대 이상이고 해마다 5천명 가까이 세상을 뜨고 있다는 점이다. 이별의 통한을 풀지 못한 채 세상을 등지는 이들이 많아지면서 실향민이라는 용어도 서서히 지워지고 있다. 그러나 이산가족이 사라진다고 분단의 사각지대가 없어진 것도, 그 아픔을 체감하는 이들이 없어진 것도 아닌 듯하다. 추석이면 임진각 그곳에서 새로운 이산가족들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말투에서 혹은 북쪽을 바라보는 눈길에서 누가 얘기하지 않아도 한국에 온 북쪽 출신자들임을 알 수 있다. 전쟁이 만든 이산가족처럼 그들도 분단이 낳은 교량자다. 아마도 분단이 지속되는 한 한반도에서 이산가족은 줄어들지 않을 것이고, 고통 또한 계속될 것이다. 특히 이번 추석을 맞는 이산가족들과 고향을 떠나온 북한 출신자들의 마음이 예년 같지 않다. 올해는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 시도조차 안 돼 실향민들의 실낱같은 기대는 무너졌다. 북한 출신자들이 품었던 자유와 풍요에 대한 희망도 이번 추석만큼은 예외였던 것 같다. 추석 전 아사로 추정된 봉천동 탈북 모자 사건과 이후 고시원에서 숨진 채 발견된 중년의 탈북인, 한강에 투신한 탈북 대학생 사건 등 곰비임비 목숨을 끊는 비극이 연이어 일어나면서 그들의 한가위는 위축됐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고향을 그리워할 여유조차 없이 무겁고 추운 마음으로 보내야 하는 이들이 우리 곁에 있다. 꿈에서조차 가볼 수 없는 멀고 먼 고향이거나 올해 추석이 너무 이른 탓만은 아닌 것 같다.
칼럼 |
[공감세상] 2019년 추석 단상 / 주승현 |
인천대 통일통합연구원 교수 민족 최대의 명절 추석은 북한에서 ‘민속명절’로 불린다. 우리처럼 민족의 대이동과 같은 교통체증이 없고 성묘객도 많지 않다. 하지만 남북 모두 삼국시대부터 전해져온 민족의 명절을 여전히 중요하게 쇠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남북 분단 74년으로 인해 추석의 풍경은 조금씩 다르더라도 풍요롭고 정겨운 한가위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마음은 같다. 고향에서 보냈던 추석은 요란하지는 않았지만 자주 볼 수 없었던 친척들을 만나는 풍성한 기쁨이 컸다. 어릴 적 사촌 형들이 이끈 시냇가에서 고기잡이와 밤 따기, 사촌 누나들이 챙겨주는 작지만 의미있는 선물들은 다음 해 추석을 기다리게 하는 농밀한 추억이 된다. 성묘길에 매번 샛길로 새는 일이 다반사였고 그 추궁은 오롯이 사촌 형 누나들의 몫이지만 제사가 끝나면 둘러앉아 음식을 나누며 서로의 화목을 도모했던 정겨움과 넉넉함은 지금도 어제인 듯 선명하다. 군 시절 비무장지대 북쪽에서 맞던 추석은 또 다른 피상적 관찰로서의 경험이다. 정전협정 이전까지 마을이었던 비무장지대(DMZ) 지역에 있던 조상의 묘소를 미처 옮기지 못한 개성 주민들도 있었다. 어느 추석날 생면부지의 민간인이 비무장지대로 들어가는 선임병을 붙들고 건넸다는 술병에는 비무장지대 어디엔가 묻혀 있는 조상의 무덤에 술 한잔 올리려 했던 자손의 마음이 담겨 있었다. 남겨진 술을 나누어 마시는 우리네 기분도 심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추석에 보는 남쪽 지역은 색다른 풍경이다. 크리스마스 때는 국군 감시초소(GP)에 설치된 트리 속에서 흘러나오는 캐럴이, 설날에는 화려한 조명으로 둘러싼 전광판이 이색적이라면, 추석에는 ‘자유로’를 오가는 자동차들이 장관이다. 평소 가깝게 지내던 정치장교에게 자유로를 달리는 많은 자동차에 대해 질문한 적이 있다. 그는 남조선의 모든 고속도로는 자유로를 통해서만 진입할 수 있기에 많아 보이는 것이라고 했는데, 추석날 자유로의 교통체증은 더 부연설명이 필요 없었다. 그 자유로 끝에 있는 임진각은 한국으로 온 뒤 단골로 찾는 곳이다. 처음 몇해 동안은 고향을 바라보며 망향제를 지내는 이산가족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임진각에서 추석날에 마주치던 수많은 이산가족이 놀랍게도 10년이 흐른 지금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1988년부터 상봉을 신청한 이산가족 13만3306명 가운데 7만9466명이 한을 풀지 못한 채 운명했다. 안타까운 건 생존자 5만3887명 중 86%가 70대 이상이고 해마다 5천명 가까이 세상을 뜨고 있다는 점이다. 이별의 통한을 풀지 못한 채 세상을 등지는 이들이 많아지면서 실향민이라는 용어도 서서히 지워지고 있다. 그러나 이산가족이 사라진다고 분단의 사각지대가 없어진 것도, 그 아픔을 체감하는 이들이 없어진 것도 아닌 듯하다. 추석이면 임진각 그곳에서 새로운 이산가족들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말투에서 혹은 북쪽을 바라보는 눈길에서 누가 얘기하지 않아도 한국에 온 북쪽 출신자들임을 알 수 있다. 전쟁이 만든 이산가족처럼 그들도 분단이 낳은 교량자다. 아마도 분단이 지속되는 한 한반도에서 이산가족은 줄어들지 않을 것이고, 고통 또한 계속될 것이다. 특히 이번 추석을 맞는 이산가족들과 고향을 떠나온 북한 출신자들의 마음이 예년 같지 않다. 올해는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 시도조차 안 돼 실향민들의 실낱같은 기대는 무너졌다. 북한 출신자들이 품었던 자유와 풍요에 대한 희망도 이번 추석만큼은 예외였던 것 같다. 추석 전 아사로 추정된 봉천동 탈북 모자 사건과 이후 고시원에서 숨진 채 발견된 중년의 탈북인, 한강에 투신한 탈북 대학생 사건 등 곰비임비 목숨을 끊는 비극이 연이어 일어나면서 그들의 한가위는 위축됐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고향을 그리워할 여유조차 없이 무겁고 추운 마음으로 보내야 하는 이들이 우리 곁에 있다. 꿈에서조차 가볼 수 없는 멀고 먼 고향이거나 올해 추석이 너무 이른 탓만은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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