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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9.16 18:07 수정 : 2019.09.18 09:23

이우연
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위원, <반일 종족주의> 공동저자

「편집자 주: <한겨레>는 9월2일치 신문에 <반일 종족주의> 반박 특별 기고 시리즈로, 정혜경 일제강제동원&평화연구회 연구위원의 글을 게재한 바 있습니다. 이에 대해 해당 책의 공동저자인 이우연 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이 반론글을 보내왔습니다. 관련 이슈에 대한 활발한 토론의 장을 제공하는 취지에서 이우연 연구위원의 글을 게재합니다.」

필자는 책 <반일 종족주의>에서 “당시 조선인 청년들에게 일본은 하나의 ‘로망’이었다”고 썼다. 전시 노무동원이 실시된 1939년 9월부터 1945년까지 일본으로 간 조선인은 72만4천여명이다. 그런데 같은 기간에 전쟁과 관계없이 순전히 돈벌이를 위해 일본으로 간 조선인이 180만여명이었다. 이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일본은 최고 선진국 중 하나였고, 임금은 조선의 몇배였지만, 조선에서는 일자리를 찾기조차 어려웠다. 장대한 미래를 꿈꾸는 조선 젊은이들에게 일본이 “로망”이 아니었다면 그 무엇이었겠는가?

피동원 노무자 중에서 4할이 사업장 도착 전후에 도망했다. 정혜경 일제강제동원&평화연구회 연구위원은 <한겨레> 9월2일치 <반일 종족주의> 반박 특별기고(강제동원 아닌 취업? 조선인 ‘도망자’ 40%는 왜 나왔나)에서, 이를 두고 “로망인데 왜 탈출”을 했겠느냐고 말했다. 그에게 일본은 로망이든가 지옥이든가, 둘 중 하나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단순화가 지나치다. 조선의 젊은이들에게 일본은 로망이었지만 조선인 중에서 5할 이상이 배치되었던 탄광·광산은 기피 대상이었다. 일본에는 가고 싶지만 (탄)광부로 일하기는 싫었다. 도망자들은 조선으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작업환경이 더 좋은 곳에 취업했다. “로망”과 “도망”은 공존하였다.

정혜경 연구위원이 예시한 1944년 초 경북 경산군의 “집단 항거”도 마찬가지다. 그 저항이 일본행 자체에 대한 거부라고 단정해서는 곤란하다. 도망자 중 상당한 수는 오히려 노무동원을 이용하였다. 무비용에 안전하고 합법적으로 일본으로 건너간 뒤 도망한 것이다. 도주를 염두에 두고 노무동원에 응한 것이 60%였다는 조사도 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었던 격이다.

전시 노무동원은 일본을 향해 썰물처럼 밀려오는 조선인의 흐름을 노동력 부족이 극심한 탄광·광산으로 유도하려는 정책이었다. 이 속에서 “강제동원”에 해당하는 것이 1944년 9월 이후의 ‘징용’인데, 정혜경 연구위원은 필자가 “강제동원”을 부정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징용은 법률이 규정하는 그야말로 강제적인 동원 방법”임을 필자는 명기했다.

임금과 관련해서는 그가 해당 부분을 읽고 이해했는지 의심스럽다. 임금은 정상적으로 지불되었고, 그에 있어서 민족 차별은 없었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었다. 정혜경 연구위원은 조선인의 인도금액이 일본인보다 적었다는 필자의 서술이 그와 모순된다고 비판한다. 조선인은 대부분 단신으로 기숙사에서 생활했고, 일본인은 부양가족과 함께 살았다. 따라서 조선인은 임금으로부터 식대가 공제되었고, 가족이 없었기에 저축의 여력이 일본인보다 더 컸다. 그 결과 인도금액에서 차이가 발생했다. 필자는 에무카에(江迎) 탄광 운탄부(運炭夫)의 자료를 이용하여 이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필자는 조선인의 월수입이 일본인보다 적었지만 민족 차별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정혜경 연구위원은 그것도 모순이라고 말한다. 당시 임금은 성과급이었고, 위 운탄부의 10시간 노동에 따른 기본급에서는 민족 차별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일본인들의 월수입이 높은 이유는 초과 근로가 조선인보다 훨씬 많았기 때문이다. 근로의식의 차이도 있겠지만 조선인과 달리 일본인에게는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조선인들의 일상에 대해 ‘주색잡기로 수입을 탕진하는 경우도 있을 만큼 그들의 생활이 자유로웠다’고 주장했다. 그에 대해 정혜경 연구위원은 “도주자를 잡아다가 린치를 가해 목숨까지 앗아”갔다고 말한다. 잠재적 피살자가 4할인 셈이다. 그런데 조선인이 린치로 인해 사망하였다는 근거는 무엇인가? 어렵게 조달한 노동자를 손해를 무릅쓰고 살해했겠는가? 전시 일본이 무법과 야만의 사회였다는 근거는 무엇인가?

정혜경 연구위원의 비판은 상세하지 않다. “방대한 공개자료와 연구 성과를 외면하고, 편향적으로 취사선택한 자료를 근거로 한 왜곡된 주장”이라는 일방적 선고가 중심이다. 무엇을 외면하고, 방기하고, 왜곡하였는가? 독자들도 그것이 궁금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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