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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4.10 20:11 수정 : 2005.04.10 20:11

역사를 공부하다 보니 과거의 영욕을 예사로이 접하게 돼서 그런지 필자는 아무리 감동 깊은 책을 읽어도 웬만큼 눈물 흘리는 일이 없다. 그러나 최근에 책 앞에서 슬쩍 눈물을 닦은 일이 있었다. 비행장에서 시간이 남아 미국의 저명한 진보 사학자 하워드 진의 〈20세기〉라는 저서를 샀을 때 민중사 내지 민중투쟁사라고 분류돼야 할 이 책이 필자로 하여금 눈물 흘리게 할 줄은 몰랐다. 대개 민중사, 투쟁사는 조직 이름과 연혁이 골자 되는 아주 엄격한 장르로 알고 있지 않던가? 그러나 진의 이 역작을 막상 읽어내려 가니 감정을 억제하기가 어려웠다.

1912년, 매사추세츠주의 로렌스(Lawrence)라는 방직업 위주의 공업 소도시.

이탈리아, 포르투갈, 폴란드, 러시아 등 유럽 주변부에서 몰린 가난뱅이들이 1970년대 초반의 평화시장을 방불케 하는 조건 아래서 일한다. 주당 8달러의 월급 아닌 월급에다 작업 환경이 얼마나 나빴던지 10대 후반에 취직하는 노동자 중에 26세가 되기 전에 3분의 1이 이승에서 못찾은 안락을 저승에서 찾게 되었다. 기계보다 더 낮게 취급되는 그들에게 다시 월급 삭감이라는 치명적인 재앙이 닥치니 로렌스 전체가 드디어 동맹 파업의 화염에 싸이게 된다. 우리가 교과서에서 미국의 “민주주의”에 대해서 달달 외웠지만 이 책에서 묘사된 파업에 대한 당국의 태도는 박정희로서도 부끄럽지 않았을 것이다. 야만적 구타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 경찰이 한 임산부를 하도 때려 유산을 한데다 다른 여공을 살해해 놓고는 파업 노동자의 지도부를 살인죄로 고소해 감옥으로 보낸 것은 그 당시 미국의 “민주적”인 얼굴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미국 전역의 노동계가 숨을 죽이고 지켜보는 가운데 파업이 장기화되어 노동자들의 가정에서 영양실조가 만연하게 되어 먹을 게 없는데다 경찰의 폭력에 노출된 노동자 자녀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하는 고민이 생겼다. 유럽 같으면 그럴 때 타도시 노동자들이 동료들의 자녀를 임시적으로 맡아 키우는 것이 관례이었지만 왜곡된 “개인주의” 풍토가 태심한 미국에서 그런 전례가 아직 없었다. 그러다 사회주의 신문에서 궁여지책으로 로렌스 노동자 자녀들을 임시로 위탁받을 부모를 모집하는 공고를 내보냈더니 놀랍게도 뉴욕 등지의 여러 나라 출신 노동자들의 문의가 쇄도하게 됐다. 수백 명의 아이들이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로렌스를 빠져나간 뒤에 이 “비(非)미국적인 일”에 충격 받은 경찰들이 엄마와 아이들을 피범벅으로 만드는 잔혹한 장면을 연출했지만 노동자들의 연대 앞에서는 총검도 무용지물이었다. 결국에는 로렌스의 노동자들이 임금 인상을 쟁취하게 되었고 이 파업은 미국 노동운동사의 한 분수령이 된 것이었다.

그런데 왜 필자가 이 책을 읽고 눈물을 흘렸을까? 그것은 아마 진정한 “밑으로부터”의 사회주의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사회주의라는 것이 과연 무엇이냐 물어보는 사람들이 많다. 굶주림과 구타 속에서 생존과 인권을 위해 파업하는 얼굴 모를 여공의 아이를 인종·종족·종교적 배경과 무관하게 같은 노동자로서 같은 인간으로서 봐주겠다고 나서는 정신이야말로 사회주의적 노동운동의 본질일 것이다. 노동운동이 사회를 이끌어가자면 이론이나 전략이라는 올바른 “머리”도 필요하지만 이와 같이 서로를 걱정하고 생각하는 연대의식이 없다면 결국 제자리걸음인 것이다. 만약에 이라크 땅을 짓밟고 있는 미군들이 어릴 때부터 가정과 학교에서 이러한 로렌스 파업 같은 것을 제대로 배웠다면 지금처럼 돈에 몸을 팔아 점령하의 이라크라는 감옥의 간수가 되었겠는가. 인간의 동병상련에 바탕을 둔 연대를 빼버린 어용 “반쪽” 역사가 미국을 지배하게 된 것은 결국 체제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수많은 민중의 참혹한 파탄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박노자/ 오슬로 국립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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