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3.27 20:49
수정 : 2005.03.27 20:49
금강산은 하얀 눈을 이고 장전항의 바람과 함께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관광객들의 설레는 마음과 더불어 북녘땅이라는 긴장감 또한 금강산의 묘한 풍경이었다. 몇 차례의 저작권 관련 회의가 있었지만 설마 <황진이>의 작가 홍석중 선생이 회의에 참가하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지난 3월18일이었다. 그의 꼿꼿한 이마가 할아버지 벽초의 이마를 닮았다는 것도 그제야 정확히 알았다.
고백하건대 금강산을 갈 때마다 사실 나는 ‘임꺽정’의 작가이며 반일 애국자였던 벽초 홍명희를 생각했다. 그러니까 해방 후부터 남북연석회의가 열린 1948년까지 금강산은 개명의 논의로 몸살을 앓았다. 가령 그것이 ‘천리마산’ 등으로 불렸다면 지금쯤 그 느낌이 어떠했을까. 항일 빨치산들의 주장을 뒤로하고 금강산이란 이름을 지킨 사람이 바로 벽초다. 그가 “인민들이 불교를 빌려 금강산이란 이름을 지었을 때 그들에겐 사회주의가 없었습니다. 사회주의라 하여 이름을 바꾼다면 이것은 인민들의 선택에 등을 돌리는 것입니다”라고 말하자 김일성 주석이 무릎을 쳤다고 한다.
할아버지가 이름을 지킨 바로 그 금강산에서 남북 최초로 저작권 위임에 대한 문서가 전달되었다. 홍석중 선생의 서명도 있었다. 남쪽 사회에서 서명이란 일상적이지만 북에서 개인 작가의 서명이란 남다른 의미를 지닌다. 집도, 땅도, 창작물도 사회의 공동소유가 되는 체제에서 서명은 그다지 필요하지 않았으리라. 홍석중 선생은 “3일 동안 수표 연습을 했다”며 서명의 중요성과 함께 자신이 살고 있는 체제에 대해 가감없이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사실 북녘의 저작권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90년대부터였다. 북녘을 정확히 알자는 운동이 있었고 이때 구속을 무릅쓰고 도서와 영상물이 소개되었지만, 일부 분단을 빌미삼아 저작물의 도용이 있었다. 남쪽의 연구 성과물인 것처럼 혹은 자신이 창작한 작품처럼 어투와 껍데기만 슬쩍 바꾼 채 출판된 것들이 없지 않았다. 나는 그들이 자신의 죄를 덮기 위해 반통일을 주장할까 겁이 났다. 마치 우리 사회의 정직하지 못한 지식인들이 일본 것을 베낀 채 일본문화 개방에 반대하듯이 이들이 남북 문화교류의 걸림돌이 되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정치와 외교 같은 큰 분야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지만 저작권 문제 하나라도 풀 수 있다면 통일에 반대하는 사람을 하나라도 줄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다.
통일부에 ‘북한주민 접촉승인서’를 내고 저작권 관련 서류를 든 채 무작정 베이징의 북한대사관을 찾아간 게 2000년 6·15선언 직후였으니까, 남-북 간 저작권 위임증서를 이끌어내기까지는 꼬박 5년이 걸렸다. 남북경제문화협력재단 친구들의 덕이야 이루 표현할 수 없지만 <임꺽정>을 출간한 사계절 출판사의 호의적 태도와 북녘 작가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노력한 저작권사무국 장철순 부국장의 깊은 관심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홍석중 선생은 아버지 대산 홍기문의 기억도 더듬어 주었다. <리조왕조실록>의 책임 번역자였던 대산의 연구실에는 아침마다 수십 명의 젊은 학자들이 줄을 섰다고 한다. 꼼꼼히, 이것은 ‘이두’를 이용해서, 이것은 직역보다는 조선사람의 감성을 먼저 생각해 보면서, 밤 이슥하도록 연구실에서는 아버지와 후학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는 것이다. 어찌 이렇게 10년이 넘어 번역된 <리조왕조실록>이 북녘만의 성과물일 것인가. 남북을 따지기 이전에 우리는 하나의 모국어를 사용하는 민족이 아니던가. 분명 <리조왕조실록>을 비롯해 <고려사>와 <발해사>, 대산이 평생을 두고 연구하고 그의 후학들이 번역한 <조선고전문학선집>은 민족 전체의 자랑이다. 남북이 함께 공유하고 저작자의 권리를 보호하는 것은 지극히도 당연한 일이다.
홍석중 선생 자신도 역사소설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마흔이 넘은 나이에 첫 작품 <높새바람>을 썼다고 한다. <황진이> 또한 사라져가는 언어와 민족문화의 복원을 위해 지독한 외로움을 견디며 써낸 것이라 했다. 시범사업으로 먼저 해결하기로 한 작품이 <임꺽정> <고려사> <황진이>라는 게 범상치가 않다. 홍명희, 홍기문, 홍석중 삼대가 남북을 이어주는 큰 가교라는 생각으로 이별의 눈물을 감춘 채 고성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신동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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