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3.22 20:50
수정 : 2005.03.22 20:50
‘냉전의 설계자’ 조지 케넌이 지난 17일 백살을 넘긴 장수 끝에 저승으로 갔다. 1949년 그가 국무부 소련 봉쇄정책 주무 부서인 정책기획국 초대 국장 자격으로 상관인 딘 러스크에게 올린 건의서 내용의 일부는 다음과 같았다. “일본인의 영향력 및 그들의 활동이 다시 조선과 만주에 미치게 될 사태를 미국이 현실적인 처지에서 반대할 수 없게 될 날은 우리 생각보다 일찍 올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지역에 대한 ‘소비에트’의 침투를 막는 방법은 그것말고는 없기 때문입니다.”
케넌은 뒷날 과도한 군비확장 및 소련 적대정책을 비판하고 한국전쟁 때도 미군의 북진에 반대했으며 베트남전 참전에도 반대한 것으로도 알려졌지만, 그것은 그에게 갑자기 무슨 부처님 마음이 생겨서가 아니라, 그런 도발이 미·소 두 나라에 최대의 이익을 안겨준 냉전체제라는 안정적 ‘황금분할 구도’를 위태롭게 만들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더 그럴듯해 보인다.
<한국전쟁의 기원>을 쓴 브루스 커밍스 교수의 또다른 책 <한국현대사>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한국인들이 1945년 8월15일 일본의 항복과 한국 해방을 알리는 히로히토의 목소리를 처음으로 듣기 며칠 전에 국무·전쟁·해군 3부 조정위원회의 존 매클로이는 딘 러스크와 찰스 본스틸 두 젊은 대령에게 옆방에 가서 한반도 분할 지점을 찾아보라고 지시했다. … 8월10일과 11일 사이의 자정 무렵이었다. 주어진 30분 안에 러스크와 본스틸은 지도를 보고 38도선을 택했다.”
러스크는 국무장관까지 지냈고, 요즘 다시 시끄러워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한-일 협정, 독도 문제가 이 모양 이 꼴로 귀결되도록 하는데도 깊이 관여한 인물이다. 본스틸은 나중에 주한 미군사령관이 됐다.
케넌이나 러스크가 상대한 일본 정치 지도자들은 요시다 시게루, 이케다 하야토, 기시 노부스케 등 전후 일본 보수정치의 대부들이다. “만주국은 내 작품”이라고 떠벌였던 기시처럼 그들 중 상당수는 전범이거나 전쟁 협력자들이었다. 이케다는 “일본은 이토 히로부미의 길을 따라 다시 조선에 뿌리를 내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공언했다. 그들에게 전범 굴레를 벗겨주고 반공친미 나라 일본 재건의 길을 열어준 이른바 ‘일본 역류’ 정책을 입안한 주역의 한 사람이 바로 케넌이다.
반소련 보루 일본 강화계획의 일환으로 미국이 기획하고 추진한 한-일 수교 작업 제4차 한-일 회담의 일본대표 사와다 렌조는 말했다. “우리는 세 번 다시 일어나 38도선을 압록강 바깥으로 몰아내지 않으면 조상을 뵐 면목이 없다. 그것은 일본 외교의 임무다.” 그가 말한 세 번 중 첫 번째는 청-일 전쟁, 두 번째는 러-일 전쟁이었다. 그에게 38도선 이남은 이미 남의 땅이 아니었던 것이다.
19일 대만 <중화일보>가 전한 류더하이 대만정치대학 교수의 얘기는 흥미롭다. “현재 남북한뿐 아니라 중국, 러시아 또한 일본과 관계가 좋지 않아 계속 갈등을 빚어왔기 때문에 독도 문제를 계기로 남북·중·러가 손잡고 미·일에 대항하는 연성 양극대결 구도가 형성될 수 있다.” 동북아시아 대결구도에서 남북은 분단 이래 언제나 서로 다른 진영에 속해 있었다. ‘연성’이라는 말이 붙어 있듯이, 비록 그 대결구도가 적대적 대타적 구도는 아니라 할지라도 남북이 같은 짝에 속하도록 짜인다면 중대한 변화다.
미국은 요시다와 이케다, 기시, 사와다의 직계 후예들이 여전히 ‘망언’을 멈추지 않고 있는 일본의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을 부추기면서 ‘사활적인 동맹관계’를 강화함으로써 독도 문제에 관해 내세우고 있는 자신들의 엄정 중립 자세가 얼마나 가소로운 위선인지를 스스로 드러냈다. 미·일의 우익들은 1905년 가쓰라-태프트 밀약 이래 지금도 동북아 판짜기를 주도하고 있다. 다만 반세기 전과는 달리 남북이 같은 짝에 들어가게 된다면 그것은 세상이 그만큼 변했기 때문일 터이다.
아직도 분단된 채 서로 총을 겨누며 막대한 역량을 소진하고 있고, 외국군이 주둔하고 있으며, ‘1천만 이산가족’의 눈물이 마르지 않고 한쪽에서 수백만명이 굶주리고 있는 한반도의 비참에 미·일이 조금이나마 속죄하는 길은 자명하다. 역사는 미·일 우익들이 그들의 의도와는 달리 결과적으로 남북을 같은 짝에 들도록 돕는 간지를 발휘할까.
한승동 국제부장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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