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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3.20 18:23 수정 : 2005.03.20 18:23

겨울이 끝나면서 겨울연가도 끝났는가. 국민들의 일본에 대한 적대 감정이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2005년 한·일 우정의 해’가 오려면 아직도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여전히 많은 한국인들이 식민의 유산을 흉터가 아닌 상처로 안고 있는 현실에서,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나 역사교과서의 왜곡 기술을 남의 나라 일, 과거의 일로 간단히 치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최근 독도 영유권을 둘러싸고 한국에서 이토록 격렬한 반응이 일어난 것은, 식민의 아픈 기억이 독도를 통해서 환기될 뿐 아니라 정서적으로도 반복 체험되기 때문일 것이다.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 답답함을 금할 길이 없다. 거의 모든 정치세력들이 일본에 대한 강경책을 주문하고, 극렬한 반일 시위가 일본 대사관 주변에서 연일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식의 감정 표출이 올바른 해결책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오히려 배타적인 민족주의가 한국사회의 유일한 이념처럼 급부상하는 현실은 일본 우익들의 활로를 열어준다는 점에서, 그리고 한국 사회의 다양한 문제와 목소리들을 뒤덮어버린다는 점에서 달갑지 않은 현상임이 분명하다.

식민 유산의 극복과 한·일 우호 증진을 위한 진보적인 대안은 없는 것일까. 적어도 한국의 우파들에게 기대를 거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다. 구체적 입장을 떠나 그들에겐 문제에 대한 권위 자체가 없다. 한국 우파의 주류는 식민시기에 다양한 이유를 들어 민족을 방기했고, 해방 후에도 민족보다는 반공을 우선시했던 세력이다. 게다가 다른 나라가 아닌 일본의 지배를 받았다는 점에 감사할 정도로, 민족자존에 대한 자각이 없는 세력이다.

하지만 좌파라고 해서 어떤 적극적 비전을 내놓고 있는 건 아니다. 우파가 민족을 방기했기 때문에 무기력하다면 좌파는 민족을 떠안으면서 어떤 제약을 받고 있는 게 아닐까. 한국 좌파의 주류는 좌파의 전통 슬로건인 ‘인터내셔널리즘’보다는 ‘내셔널리즘’에 훨씬 경도된 것으로 보인다. 민족을 뛰어넘는 진보적 운동에 대한 상상이 빈곤한 것은 그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사태가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은, 한국 좌파가 문제 해결을 위해 민족주의를 동원할수록 일본 우파에게 먹이감이 던져진다는 사실이다.

어디서 해결책을 찾을 것인가. 나는 이 딜레마가 좌파의 전통적 지혜인 ‘인터내셔널리즘’을 통해서만 극복될 수 있다고 믿는다. 지금 대결이 필요한 것은 민족 대 민족, 국가 대 국가가 아니라 패권과 자유, 전쟁과 평화이다. 나는 군국주의자들에 반대하는 ‘반전평화 인터내셔널’의 구축을 통해서만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그리고 해결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더욱이 ‘북핵문제’를 계기로 위협적인 목소리를 내고 있는 미국과 일본의 강경세력들을 염두에 둘 때 이것이 정말로 시급하다고 생각한다.

냉철하게 다시 한 번 자문해보자. 식민의 유산을 걷어내는 일은 어떻게 가능한가. 한·일 간의 우호란 무엇을 말하는가. 확실한 것은 비난과 적대를 통해서는 그 누구도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지금은 일본을 비난할 때가 아니라 일본 민중들과 손을 잡을 때이다. 그들과 진정으로 친구가 될 때이다. 그래서 일본과 한국의 전쟁 세력, 군국주의 세력을 함께 몰아낼 수 있는 평화의 지렛대를 양국 민중들 속에 깊이 심어야 할 때이다.

나는 이렇게 믿고 있다. 아시아로부터 전쟁의 망상을 걷어내는 것, 아시아에 평화의 공동체를 세우는 것이야말로 우리를 식민지로 만들었던 일본 군국주의에 대한 가장 통쾌한 복수라고. 그리고 양국 민중들이 평화를 위한 강고한 동맹을 맺을 때, 그것이 어떤 사과보다도 진정한 사과이며, 어떤 청산보다도 진정한 청산일 것이라고.

고병권/ 연구공간 ‘수유+너머’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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