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2년 초반 일본 외무성은 독도를 미군 폭격연습지로 지정·해제하는 책략을 추진했다. 일본 정부와 미군이 독도를 폭격연습장으로 활용하는 협정을 맺어 독도가 일본의 영토임을 확인케 한다는 것이었다. 일본 국회의사당에서 중의원 의원과 외무성 고위관리들이 버젓이 이런 얘기를 주고받았다. 그해 7월26일 독도가 미 공군훈련구역으로 선정됐고, 9월15일 독도에서 고기잡이하던 한국어선 광영호가 미군기의 폭격을 받았다. 일본은 한국이 허약하고 위기에 처했을 때 독도를 강점하기 위한 수많은 국가 공문서들을 조작해왔고, 기회를 노려왔다. 5·16 이후 일본은 정통성이 없는 한국 군사정부를 상대로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거나 폭파해버리자고 제안했고, 미 국무부 문서를 보면 한국의 최고 권력자들은 이에 동조했다. 독도는 역사적·현실적으로 의문의 여지없는 한국의 영토다. 문제는 한국정부가 팔짱을 끼고 국민들의 정서와 요구를 탓하며 실효적 지배만을 주장했다는 점이다. 그 사이 일본은 국가·민간차원에서 대내외적 선전·홍보는 물론 조사·연구작업을 진행해왔다. 일본이 국가차원의 조작을 시작한 1905년 이후 100년이 흘러 바로 그 시마네현 의회가 독도의 날 조례를 제정했다. 한국은 더 이상 허약했던 몰락 왕조가 아니다. 합리적이지만 단호하고, 필요에 따라서는 적극적인 정부의 조처가 필요하다. 국가이익은 ‘외교’로만 지켜지지 않는다. 국제사회의 정의가 재판정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학계는 냉정하고 이성적으로 일본 주장의 근거와 논리를 비판하는 한편 한국의 입장을 증명·강화할 수 있는 제3자적 증거의 발굴과 논리개발에 힘쓸 책임이 있다. 나아가 이를 국제사회에 설득시키는 장기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얼마 전 독도가 한국령임을 표시한 영국 외무성 지도를 찾았을 때, 기쁨과 함께 참담한 심정이 되었다. 바로 이렇게 손쉽게 찾을 수 있는 자료를 한국 정부·학자들이 모르고 있었다는 자괴감 때문이었다. 한편으로 두려움이 일었다. 과연 한국 외교부와 일본 정부·학자 중 누가 먼저 문의할 것인가? 두려움은 현실로 바뀌었다. 일본학자는 자료를 보자고 했지만, 한국정부로부터는 어떠한 문의도 없었다. 부디 한국 외교부가 1905년, 1951년 한국관리들의 전철을 밟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정병준/목포대 교수(한국 현대사)
칼럼 |
[기고]일본, 100년동안의 조작 |
1952년 초반 일본 외무성은 독도를 미군 폭격연습지로 지정·해제하는 책략을 추진했다. 일본 정부와 미군이 독도를 폭격연습장으로 활용하는 협정을 맺어 독도가 일본의 영토임을 확인케 한다는 것이었다. 일본 국회의사당에서 중의원 의원과 외무성 고위관리들이 버젓이 이런 얘기를 주고받았다. 그해 7월26일 독도가 미 공군훈련구역으로 선정됐고, 9월15일 독도에서 고기잡이하던 한국어선 광영호가 미군기의 폭격을 받았다. 일본은 한국이 허약하고 위기에 처했을 때 독도를 강점하기 위한 수많은 국가 공문서들을 조작해왔고, 기회를 노려왔다. 5·16 이후 일본은 정통성이 없는 한국 군사정부를 상대로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거나 폭파해버리자고 제안했고, 미 국무부 문서를 보면 한국의 최고 권력자들은 이에 동조했다. 독도는 역사적·현실적으로 의문의 여지없는 한국의 영토다. 문제는 한국정부가 팔짱을 끼고 국민들의 정서와 요구를 탓하며 실효적 지배만을 주장했다는 점이다. 그 사이 일본은 국가·민간차원에서 대내외적 선전·홍보는 물론 조사·연구작업을 진행해왔다. 일본이 국가차원의 조작을 시작한 1905년 이후 100년이 흘러 바로 그 시마네현 의회가 독도의 날 조례를 제정했다. 한국은 더 이상 허약했던 몰락 왕조가 아니다. 합리적이지만 단호하고, 필요에 따라서는 적극적인 정부의 조처가 필요하다. 국가이익은 ‘외교’로만 지켜지지 않는다. 국제사회의 정의가 재판정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학계는 냉정하고 이성적으로 일본 주장의 근거와 논리를 비판하는 한편 한국의 입장을 증명·강화할 수 있는 제3자적 증거의 발굴과 논리개발에 힘쓸 책임이 있다. 나아가 이를 국제사회에 설득시키는 장기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얼마 전 독도가 한국령임을 표시한 영국 외무성 지도를 찾았을 때, 기쁨과 함께 참담한 심정이 되었다. 바로 이렇게 손쉽게 찾을 수 있는 자료를 한국 정부·학자들이 모르고 있었다는 자괴감 때문이었다. 한편으로 두려움이 일었다. 과연 한국 외교부와 일본 정부·학자 중 누가 먼저 문의할 것인가? 두려움은 현실로 바뀌었다. 일본학자는 자료를 보자고 했지만, 한국정부로부터는 어떠한 문의도 없었다. 부디 한국 외교부가 1905년, 1951년 한국관리들의 전철을 밟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정병준/목포대 교수(한국 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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