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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3.16 18:47 수정 : 2005.03.16 18:47

1904년 9월 시마네현 어부 나카이 요사부로는 독도를 일본 영토로 편입시켜 자신에게 대여해줄 것을 일본 정부에 청원했다. 다음 해 1월28일 일본 정부는 독도를 다케시마라는 이름으로 자국령에 편입시켰고, 이를 시마네현 현보에 고시했다. 나카이는 독도가 한국령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일본은 독도에 러시아함대 감시용 망루를 세웠다. 대한제국 정부는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1년 뒤 울릉군수 심흥택의 보고로 뒤늦게 사태를 파악했으나 러-일전쟁의 와중에 일본 군대가 궁성을 점령했고, 외교권은 박탈당한 상태였다. 일본이 주장하는 무주지 영토편입론의 출발이었다.

2차대전에서 패했으나 일본은 영토욕심을 버리지 않았다. 식민지는 돌려주지만 19세기 이래 영토로 편입한 섬들은 차지하겠다는 의도였다.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서 발굴한 자료에 따르면 일본 외무성은 1946~7년간 모두 8개 도서지역에 대한 자료를 만들어 연합국에 배포했다. 1947년 6월 작성된 팸플릿은 독도는 물론 울릉도까지 일본령으로 소개하고 있다. “울릉도에 대해서는 한국이름이 있지만, 다케시마에 대해서는 한국 이름도 없고 한국지도에 표시되어 있지도 않다”고 썼다. 명백한 허위정보였다. 한국은 정부수립 이전이었고, 미소·남북·좌우 대립이 치열하던 때였다.

1949년부터 미국 중심의 대일 단독강화가 예견되었다. 일본은 샌프란시스코 평화회담(1951년 9월)의 준비과정에서 미국을 상대로 가능한 모든 로비를 벌였다. 1949년 11월 주일 미 국무부 정치고문이던 윌리엄 시볼드는 독도가 일본령이며 여기에 기상관측소와 레이다기지를 설치하는 안보적 고려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냈다. 시볼드는 영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를 둔 일본인 2세와 결혼해 일본에서 오래 법률회사를 운영했던 ‘지일파’였다. 시볼드와 일본수상 요시다 시게루는 한국의 이익을 방해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요시다는 재일 한국인 100만명이 공산주의자·범죄자라며 추방을 주장했고, 한국의 연합국지위 부여에 반대했다. 시볼드는 한-일 관계 정상화를 한, 일 두나라에 맡기자는 일본 쪽 입장을 강조해 한국의 대일 배상·청구권 해결을 원천 봉쇄했다.

일본은 국제조약의 조약 한 구절이 국가운명·이익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잘 알고 있었고, 이를 관철하기 위해 수많은 문서작업들을 진행했다. 심지어 국가차원의 조작문서 작성도 마다하지 않았다. 반면 신생 한국은 정부의 외교적 경험과 시스템이 전무했고, 외교적 자원도 부족했다. 1951년 대마도·독도·파랑도가 한국영토라는 주미 한국대사의 비망록을 접한 존 포스터 덜레스 대통령 특사는 독도와 파랑도의 위치를 문의했다. 대사는 좌표도 모른 채 독도와 파랑도가 동해상에 있다고만 답변했다. 한국 정부는 독도가 샌프란시스코 회담 과정에서 논의된다는 사실조차 전혀 모르고 있었다.


1952년 초반 일본 외무성은 독도를 미군 폭격연습지로 지정·해제하는 책략을 추진했다. 일본 정부와 미군이 독도를 폭격연습장으로 활용하는 협정을 맺어 독도가 일본의 영토임을 확인케 한다는 것이었다. 일본 국회의사당에서 중의원 의원과 외무성 고위관리들이 버젓이 이런 얘기를 주고받았다. 그해 7월26일 독도가 미 공군훈련구역으로 선정됐고, 9월15일 독도에서 고기잡이하던 한국어선 광영호가 미군기의 폭격을 받았다.

일본은 한국이 허약하고 위기에 처했을 때 독도를 강점하기 위한 수많은 국가 공문서들을 조작해왔고, 기회를 노려왔다. 5·16 이후 일본은 정통성이 없는 한국 군사정부를 상대로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거나 폭파해버리자고 제안했고, 미 국무부 문서를 보면 한국의 최고 권력자들은 이에 동조했다.

독도는 역사적·현실적으로 의문의 여지없는 한국의 영토다. 문제는 한국정부가 팔짱을 끼고 국민들의 정서와 요구를 탓하며 실효적 지배만을 주장했다는 점이다. 그 사이 일본은 국가·민간차원에서 대내외적 선전·홍보는 물론 조사·연구작업을 진행해왔다. 일본이 국가차원의 조작을 시작한 1905년 이후 100년이 흘러 바로 그 시마네현 의회가 독도의 날 조례를 제정했다.

한국은 더 이상 허약했던 몰락 왕조가 아니다. 합리적이지만 단호하고, 필요에 따라서는 적극적인 정부의 조처가 필요하다. 국가이익은 ‘외교’로만 지켜지지 않는다. 국제사회의 정의가 재판정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학계는 냉정하고 이성적으로 일본 주장의 근거와 논리를 비판하는 한편 한국의 입장을 증명·강화할 수 있는 제3자적 증거의 발굴과 논리개발에 힘쓸 책임이 있다. 나아가 이를 국제사회에 설득시키는 장기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얼마 전 독도가 한국령임을 표시한 영국 외무성 지도를 찾았을 때, 기쁨과 함께 참담한 심정이 되었다. 바로 이렇게 손쉽게 찾을 수 있는 자료를 한국 정부·학자들이 모르고 있었다는 자괴감 때문이었다. 한편으로 두려움이 일었다. 과연 한국 외교부와 일본 정부·학자 중 누가 먼저 문의할 것인가? 두려움은 현실로 바뀌었다. 일본학자는 자료를 보자고 했지만, 한국정부로부터는 어떠한 문의도 없었다. 부디 한국 외교부가 1905년, 1951년 한국관리들의 전철을 밟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정병준/목포대 교수(한국 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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