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3.15 18:46
수정 : 2005.03.15 18:46
언제부터인가 신문·잡지·방송에서 ‘진검승부’라는 혐오스럽기 그지없는 왜색어가 판을 치고 있다. 죽기 살기로 결판을 내야 할 막다른 고비, 이를테면 크게는 월드컵 16강이 걸린 예선 마지막 게임 같은 것에서 작게는 흔해 빠진 웬만한 맞수 대결에 이르기까지, 단골로 써먹는 말이 바로 이 ‘진검승부’다. 차라리 원어대로 ‘신켄쇼부’로 표기했다면 모를까. 도저히 한국어일 수 없는 일본 토속어를 참신한 용어인 양, 버젓이 쓰고 있으니 한심한 일이다. 어떠한 일본말이든 한자로 표기한 것이라면, 모조리 우리말로 써먹어도 될 일일까. 일본서는 쾌청한 날씨를 ‘니혼바레(日本晴)’라고 한다. “독도 상공은 일본청”이라거나, 6·25 전사자를 ‘신풍(가미카제)’ 정신으로 어쩌고저쩌고 하는 식으로, 일본어를 우리말로 믿고 기사에 쓸 사람은 없다.
주일특파원 노릇쯤 하던 누군가가 한국서는 못 보던 낯선 일본말, 더군다나 한자로 된 것이 그럴싸하게 보여 슬쩍 자랑삼아 쓰기 시작했고, 그 또래 ‘일어 얼간이’들이 멋모르고 퍼뜨렸나 보다. 아닌 게 아니라, 글자를 곧이곧대로 해석하면, 이판사판의 극한 상황을 진검승부만큼 피비린내 물씬 나게 드러낸 말도 따로 없으리라.
옛적 일본에는, 검술을 겨루면서 포인트만 가지고 우열을 가리는 미지근한 경기로는 도저히 성이 차지 않는 극소수의 변태성 칼잡이들이 있었다. 병적인 적개심을 충족하려고, 시나이(죽도)를 내던지고 흉기(일본도)를 잡고, 사생결단하는 살생 목적의 칼부림으로 암암리에 전승해 오던 것이 ‘진검승부’다. 어떤 명목으로도 살인에 지나지 않던 진검승부는 공식 시합으로 공인받지 못했다. 무사 신분을 잃은 낭인배나 조직 폭력단인 야쿠자 두목 간에 ‘신켄쇼부’라는 미명 아래 약육강식을 되풀이했으니, 지배계급인 사무라이 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범죄요, 그야말로 할복감일 뿐이었다. 진검승부를 우리말로 옮기면 영락없는 ‘칼부림’이다. 전투에서 흔한 백병전과도 본질에서 다르다. 이것은 중국 무협지에 나오는 무용담의 아류도, 서부영화 속의 결투와도 다르다. 정상적 공개 경기가 아니다. 불한당들이나 폭력 도배 칼잡이끼리 살육 목적의 칼부림일 따름이다. 진검승부가 단지 일본말이기에 쓰지 말자는 게 아니다. 진검이란 어휘는 사전에도 없다. 한국사회에는 자고로 칼이든 ‘도’든 ‘검’이라 부르든 으레 금속제다. 따라서 ‘진’이나 ‘철’자를 짐짓 덧붙여서, 살상용 흉기임을 강조할 필요가 전연 없었다.
‘신켄쇼부!’ 이 말만큼 일본의 정신적 풍토병을 여실히 간증하는 말이 따로 없다. 그 속성이 우리에게는 치명적 독소일 수밖에 없었음을 과거사가 말하고 있다. 예로부터 그들에게는 대의명분(다테마에)으로 과대 포장한, 앙갚음의 윤리의식이 유별났다. 되로 받으면 말로 갚지 않고는 못 배기는 괴팍한 성벽에 작위적 충효사상을 접목시켜 독특한 ‘일본인 기질’로 굳혀 놓았던 것이다. 다음으로 흔한 것이, 사회의 상규를 벗어난 짓이지만, 검객으로서 주가를 올리기 위해 유명한 동류를 진검승부로 죽여 없애는 살인행각이다. 낭인 무술가 미야모토 무사시가 여기에 속한다. 마지막으로, 가장 하급에 속하는 칼부림이, 야쿠자 간에 시방도 벌어지고 있는 ‘나와바리’ 텃세 싸움이다.
이런 엽기적 진검승부가 일본인의 심층심리에 도사린 기학성 복수의식을 자극함으로써 오늘날도 은근히 부러움을 사고 있음도 사실이다. 경기가 아니니, 숨어서 뒤통수를 치든 야습을 하든, 수단 방법을 가릴 것 없다. 사술이든 파렴치하든 이겨 살아남는 자가 바로 승자다.
따라서 습속규범이 전혀 다른 우리나라에서는, 어떤 구실을 붙일지라도, 진검승부는 반사회적인 한갓 ‘칼부림’에 지나지 않는다. ‘16강 문턱에서 포르투갈과 칼부림을 앞둔 한국팀’? 사정이 이런데도 진검승부에 집착할 건가? 자생지 일본서도 살생으로 승패를 가리는 의미로는 ‘신켄쇼부’라는 말은 쓰지 않는다.
전수상/전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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