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3.09 20:35
수정 : 2005.03.09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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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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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6 세대와 그 직후 세대가 앞으로 40년 동안 한국 사회의 변화를 주도할 것이라고 한다. ‘베이비붐’ 속에 태어난 이들 세대가 어른이 돼 출산율이 뚝 떨어지면서, 앞뒤 다른 세대와의 인구 비중 격차가 워낙 커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통계청의 인구 추계를 분석한 결과라니까, ‘오만한’ 386의 자가발전 논리쯤으로 가볍게 치부할 일은 아니지 싶다. 어쨌거나 ‘386’이라는 숫자만 들어도 입맛이 떨떠름한 사람들한테는 결코 달가울 수 없는 얘기다. ‘386 정권’ 2년을 못 참아 온갖 적대와 혐오를 쏟아부은 ‘반(反)386 연대’로서는, 추정일망정 더없이 우울한 전망일 것이다.
‘386의 장기 독재’를 탐탁지 않게 여길 사람들은 또 있다. 20~30대의 이른바 ‘디지털세대’다. ‘반386 연대’의 축인 50~60대가 386의 ‘정치’를 성토한다면, 이들 세대는 386의 ‘문화’를 조롱하고 있다. 낡아빠진 아날로그 문화의 끝자락을 부여잡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386의 행태는 이들로서는 경멸 대상이 아닐 수 없다. 정치적으로는 자신들의 동반자이기도 한 386도 문화적으로는 ‘쉰세대’의 고루함과 천박함을 면하지 못했다는 의구심 탓이다. 문화적으로 친숙하다는 앞선 세대한테는 정치적으로 비난받고, 정치적 우군인 뒷세대에게서는 문화적으로 조롱받는 세대, 386은 영락없는 ‘낀세대’인 셈이다.
이런 질문이 뒤따른다. 양쪽에서 협공을 받고 있는 386이 장기간 사회 변화를 주도할 수 있을 것인가? 낀세대가 이끄는 사회 변화는 의미 있는 진전일 수 있는가? 우리 사회의 386은 지금 이렇게 위로는 정치적 보수주의와 아래로는 문화적 개방주의 사이에 끼어 있다. 머리는 디지털 쪽으로 열려 있지만, 몸은 구닥다리 아날로그 세대에 반쯤 빠져 있다. 황혼 세대의 정치적 보수주의를 공격하면서도, 젊은 세대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에도 선뜻 마음을 주지 못한다. 속도와 효율성이라는 디지털의 가치를 강조하는 한편으로, 삶의 지혜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는 아날로그 세대의 대변자가 되기도 한다. 양쪽에서 압박을 받는 낀세대의 숙명이다.
태생과 성장 과정에서 386은 강한 문화적 결속력을 과시했다. 이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이 힘은 앞뒤 어떤 세대보다 단단한 것이었다. 반민주와의 선명한 대치전선을 앞두고, 민주와 대척되는 모든 가치는 곧 문화였다. 광주와 군부독재, 6월의 거리항쟁은 이들의 사고방식을 결정하고 행동양식을 좌우한 핵심 코드였다. 말과 말투가 같아졌고, 부르는 노래도 닮아 있었다. 거리에서 배운 정치는 386을 정치 개혁의 편에 서게 했고, 어깨를 겯고 함께 부른 노래의 경험은 이들을 문화적 공동체주의로 이끌었다. 386 문화의 이런 응집력은 4·19 세대와 6·3 세대의 그것을 훨씬 능가하는 것이었다.
단단하면 쉬 깨진다고 했던가? 강고하던 386의 문화적 일체감도 빠르게 해체되고 있다. 앞선 세대의 고루함에 동화되기도 하고, 뒷세대 감성 문화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기도 한다. 현실 정치를 이유로 보수주의로 선회하는 정치인이 생겨나는가 하면, 권력에 포진한 일부 386은 기성 관료보다 더한 관료문화에 빠져 허우적거린다. 사회 각 분야에 진출한 386들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나이를 먹고 진급을 하고 세상을 알게 된 탓이다. 하지만 이들은 여전히 앞세대의 경험적 보수보다 뒷세대의 감성적 진보에 친숙함을 느낀다. 입으로는 계속 흘러간 옛노래를 부르고 있지만, 가슴에서는 여전히 꽃보다 사람이 아름답다는 곡조가 울려퍼진다. 젊은 시절, 이들이 앓았던 그 열병의 흔적이 낙인처럼 가슴팍에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386 문화가 그 낀세대 문화의 특장을 살려 디지털과 아날로그 두 세대 갈등의 완충지대가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어쩌면 이미 젊은 세대의 열정과 감성, 그리고 기성세대의 지혜와 경험이 서로 신뢰하고 소통하는 마당으로 바뀌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386 낀세대의 문화가 이런 기능을 할 수 있다면, 이들 세대의 ‘40년 독재’는 우리 사회의 의미 있는 진전을 위해 여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다.
김영철 논설위원
yc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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