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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3.07 20:29 수정 : 2005.03.07 20:29

얼마 전 신문에 소개된 민영이의 사연을 보고 미국의 한 혼혈인이 편지를 보내왔다. 자신도 혼혈인이고, 경기도 송탄 지역에서 살다가 1980년에 미국에 건너간 동포이며 지금은 미국에서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었다고 했다. 자신도 어렸을 적 내가 있는 기관의 도움도 받고 후원자에게 편지도 쓰곤 했는데, 언젠가는 갚고 싶었다며 민영이를 비롯한 몇몇 혼혈아이들을 돕는 데 써달라고 수표도 함께 보내왔다. 이후 아이 몇 명을 정기적으로 돕고 싶다고도 했다.

사실, 혼혈인이 혼혈아동을 돕는 일이 흔치 않은 일이어서, 당신 사연을 소식지에 싣고 싶으니 허락해 줄 것과 사연의 내용을 더 알고 싶다는 내용을 이메일로 보냈다. 얼마되지 않아 좋다는 흔쾌한 수락의 회신을 보내 주었고, 힘들게(순전히 시간 차 때문에) 전화통화를 할 수 있었다.

아주 유쾌한 목소리의 그는 아이들에게 용기를 북돋워주는 이야기를 해주려면, 자신이 어렸을 적 아주 많이 힘들었고 그것을 다 극복했다는 내용이어야 할텐데, 미안하게도(?) 그리 힘들지도 않았고 한국의 초년기 시절을 아주 재밌게 보냈다고 말했다. 상황이 힘드냐, 그렇지 않느냐는 생각하기 나름의 것이 아니겠냐며, 자신은 그때 할 수 있는 것이 공부하는 것밖에 없어서 죽기살기로 공부만 했고, 곧잘 우등생의 자리를 지켜서인지 친구들도 많았으며 골목대장 노릇도 꽤 했다고 했다.

그런데 좀 더 긴 대화를 나누면서 더 놀라운 사실을 들을 수 있었다.

그의 나이 세 살 때 사고로 다리 한쪽을 완전히 잃었고, 그래서 의족을 착용해야만 겨우 걸을 수 있는 장애인이라는 것이다. 흑인계 혼혈에, 신체적 장애에, 한쪽 부모 가정…. 사실 어려운 조건이란 조건은 다 갖다 붙여놓은 듯한 성장환경이었지만 그에게 극복할 수 없는 것은 없었다. 혼혈은 피부색이 달라질 수 없는 것이니 별로 신경을 안 썼다고 했고, 다리 불편한 것은 의족을 착용하면 되는 것이었고, 아버지 없는 것은 나중에 아버지와 연락이 닿았기 때문에 그다지 힘들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고등학교 3학년이 되던 해 친구들과 헤어지고 미국으로 떠나야 했을 때가 가장 힘들었다고 털어놓았다. 친구들은 눈물바람으로 그녀를 배웅했고, 그 또한 말 한마디 통하지 않는 낯선 땅으로 떠나야하는 두려움이 그를 떨게 했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가. 첨부파일로 보내온 그의 모습은 장난기까지 서린 아주 밝은 모습이었고 그래서인지 아주 기분이 좋아지는 인상이었다. 나이가 들어도 자신의 모습은 아직도 ‘까불이’이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다보니 계속 까불이가 될 것 같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6월이면 한국에 다녀갈 것이라는 그는 자신의 고향 송탄에 가서 어렸을 적 친구들도 만나고 자신이 후원하는 혼혈 아이들을 만나보고 싶다며 벌써부터 설레는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너무나 유쾌한 그에겐 ‘신체적 장애’와 ‘사회적 편견’은 그냥 우리가 지어낸 말에 불과했다.


그를 만나게 되다니, 나도 설렐 것 같다.

이지영/펄벅재단 사회복지사, 간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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