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2.28 19:45
수정 : 2005.02.28 19:45
지난 2003년 10월, 서울 강남지역을 중심으로 집값이 천정부지로 뛰고 있을 때였다. 몇몇 경제 전문가들과 둘러앉은 자리에서 자연스레 부동산 시장 안정대책을 두고 얘기들이 오갔다. 이대로는 안 된다고 하는 데는 모두 동의했지만 어느 정도 강도로 부동산값을 안정시킬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견들이 갈렸다.
그때 한 사람이 재미있는 제안을 했다. 두 명의 학자에게 각자 나름의 대책을 만들라고 해보자는 것이다. 한 학자는 서울 강남에 집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 다른 한 사람은 무주택자. 당사자가 처한 상황에 따라 내놓는 대책이 달라질까. 그래도 학자적 양심이 있는데, 사적인 이해관계에 따라 공적인 대책을 왜곡시킬 수 있을까? 하지만 얘기를 꺼낸 그 경제학자는 ‘결과는 분명히 다를 것’이라고 확언했다. 아무리 학자적 양심이 있더라도 개인의 이해를 초월해 중립적인 대책을 내놓기는 쉽지 않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그럼 공직자들은 어떨까? 그들의 사회경제적 조건과 그들이 만드는 정책과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까. 투철한 공복정신으로 무장한 공직자들이라서 개인의 이해관계가 정책 수립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을까. 외환위기 이후 가장 어려웠다던 지난해, 고위공직자 75%의 재산이 늘었다는 보도를 보면서 드는 의문이다. 같은 날 발표된 가계수지 통계를 보면, 전국 가구의 30% 가까이가 적자를 면치 못했다. 재산 증식은커녕 먹고살기도 바빴던 셈이다. 그렇다면 한 해 수억원씩 재산을 늘린 공직자들이 이처럼 하루 벌어 먹기도 빠듯한 사람들을 위한 정책을 제대로 만들어냈을까?
돈 많은 공직자들이 자신에게 유리한 정책을 만들어 왔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겉으로는 서민을 위한다며 교묘하게 자신들과 동류인 기득권층의 이익만 대변해 왔다고 말하려는 건 더더욱 아니다. 일반 국민과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는 고위 공직자들이 과연 국민 편에 서서 제대로 된 정책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하는 점을 지적하려는 것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아주 단순하게는 고위 공직자를 임명할 때 재산이 일정 규모가 넘는 사람은 아예 제외하는 방법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를 추구하는 우리 사회에서 그런 기준을 설정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그렇더라도, 장차관 등 정무직 고위 공직자를 임명할 때는 일반 국민 정서와 너무 동떨어진 거액 재산가는 신중히 선택하는 게 좋을 듯싶다. 재산이 많다는 것 자체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이들로부터는 평균적인 국민 정서에 바탕을 둔 정책을 기대하기 어려울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설사 공직자의 양식과 윤리의식이 투철하더라도 사람들이 이를 믿지 않으면 소용 없다. 자칫 이들이 만드는 정책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또, 우리 사회의 재산 축적 과정을 볼 때, 재벌 2세이거나 기업가로서 성공한 경우 등을 빼고는 정당한 방법으로 수십, 수백억원대의 재산을 모으기는 쉽지 않다. 재산 증식 과정에서 이런저런 탈법과 편법이 동원됐을 가능성이 높다. 보통 사람이라면 관행이려니 하며 넘어갈 수 있지만 고위 공직자에게는 훨씬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게 우리 현실이다.
바람직하기는 공직에 있는 동안 재산 증식을 최대한 억제하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다. 고위 공직자란 공복으로서 국민에게 봉사하는 것을 최대 영광으로 삼으면 되는 자리다. 따라서 일정 직위 이상의 고위 공직자에 대해서는 부동산이나 주식 투자 금지 등 어느 정도의 재산권 행사 제한은 할 수 있다고 본다. 이는 고위 공직자들을 못 믿어서가 아니라 국민들이 공직자를 신뢰하고, 그래서 그들이 만드는 정책이 효율적으로 집행될 수 있는 여건을 만들기 위함이다. 이런 장치들은 지금 너무 느슨하다.
그래도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공직자의 소명 의식이다. 공복을 자처하는 공직자는 평소에 국민 곁으로 내려와야 한다. 자신들의 사회경제적 조건과 관계 없이 눈높이를 평균적인 국민의 생활수준으로 낮추라는 것이다. 그래야만 진정으로 국민을 위한 정책이 나온다. 늘 겸손하게 서민의 삶을 챙기는 자세로 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하면, 재산의 많고 적음을 누가 시비하겠는가.
정석구 논설위원
twin86@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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