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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2.15 17:44 수정 : 2005.02.15 17:44

지구촌이 세계화의 파고로 자율화, 개방화의 격랑에 싸여 있다. 하지만 유독 이에 아랑곳하지 않는 곳이 있으니 학교가 바로 그곳이다. 그래서 많은 국민들은 교사가 변해야 교육이 변할 것처럼 목청을 높인다. 그렇지만 이 지적도 학교 메커니즘을 잘 알고 나면 사정이 달라진다. 교사 이전에 변해야 할 것이 있다.

교사인 필자도 수업평가를 꼭 받고 싶다. 하지만 지금처럼 교육이 관료적 시스템에 침잠해 있어서는 교사가 변한다고 해서 교육이 크게 달라질 것은 없다. 교육부나 학교의 제도적 차원의 개혁이 전제란 말이다. 해방 이후 우리의 학교는 ‘교육부-교육청-교장’으로 이어지는 관료적 지배체제를 굳혀왔다. 아직도 국가주의적 교육목적 달성을 위한 명령하달 구조 그대로다. 때문에 학교교육 활동 전반이 이에 의해 장악되고 있다. 자율적이어야 할 교사들의 직원회의나 학생회가 단순한 관료적 하부구조에 불과하다.

예를 들면 교복·수학여행지·앨범 선정, 보충수업 및 자율학습의 결정 등이 교육주체(학부모, 학생)들의 자율에 의해 이루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부분이 학교쪽 즉 ‘교장-교감-부장’으로 이어지는 수직적 명령체계를 통해 일방적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교육주체들이 배제된 수의계약이나 일방 통보식 결정을 하다 보니 잡음도 잦다.

학교가 왜 이럴까?

간명하다. 왜곡된 ‘명령-하달 시스템’과 ‘승진시스템’으로 인해 ‘교육부-교육청’과 ‘교장’이 학교를 장악하고 있고 이로 인해 학교가 수직적 리더십으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이런 폐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먼저, 교사들의 승진제도인 교장자격증제를 교장보직제로 변환시키는 제도적 차원의 개혁이 필요할 것이다. ‘정실에 의한 제 사람 심기’나 ‘수업과는 무관한 점수따기에 매진하도록 옭아매는 식’의 승진제도가 아니라, 교장을 단순 보직개념으로 자리매김하여 수평적 리더십을 통한 의사소통구조를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학교자치의 전제조건이기도 하다. ‘가르치고 배우는 일’이 학교의 가장 중요한 기능으로 자리매김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지금도 학교 내 심의기구로 학교운영위원회가 있지만 이것이 학교 쪽의 결정을 단순 추인하는 것에 불과한 폐쇄적 자문기구적 성격을 띠는 형국이라 교사나 교육주체들의 의사를 제대로 반영하기 어렵다. 따라서 이들의 자율적인 의사를 대변할 ‘각 자치회(학부모회, 학생회, 교사회)의 법제화’를 통한 ‘의결기구화된 학교운영위의 결성’이 요구된다.

그러나 전제되어야 할 것이 있다. 상층 관료체제인 ‘교육부와 교육청의 권력’이 문제다. 학교자치를 위해서는 교육부의 관료적이고 비대한 권력적 기능, 즉 예산집행권과 교육과정 편성권, 평가권 등을 각 지역 교육청이나 학교로 넘겨 일방적 지시체계를 없애는 변혁이 필수적이다. 그런 연후에 교육부를 단순 학교지원센터의 역할만 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이를 교육자치와 연관시킬 필요는 없을 것이다.)


우리의 교육을 바꾸자면 이렇듯 총체적인 왜곡 구조를 깨뜨릴 일이다. 광복 이후 변한 것이라고는 없는 ‘교육부, 교육청의 비대해진 관료시스템’과 ‘교장 임용방식’을 바꾸지 않는 한 교육개혁은 요원하다. 교육수요자들이 머리를 맞대는 학교자치를 구현하자면 ‘어떤 방식으로 어떤 것을 어떻게 교육을 할 것인지’를 각 자치회가 자율 결정하도록 해야 한다.

학교에 군림하고 지시하는 자가 없어야 학교 본래의 제 기능을 온전히 할 수 있다. 그러자면 교육수요자가 원하는 방식으로 교육서비스를 공급하는 학교로 바뀌어야 한다. 수요자들의 의사대로 바람직한 학교가 존재하기란 불가능할 것인가? 아니다. 교육개혁에 가장 성공한 사례인 뉴질랜드의 학교(학부모와 학생들이 바라는 학교를 만들어 가고 있으며 교장도 이들의 수요를 단순 집행하는 기관)는 지금 현재 진행형이다.

황선주/경북기계공업고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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