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2.13 17:16
수정 : 2005.02.13 17:16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기분이 울적하고 심란할 때는 달거나 매운 음식이 위로가 된다. 속이 쓰리도록 달콤한 것들을 우걱우걱 씹어 삼키고, 혀가 얼얼하도록 맵고 뜨거운 것들을 훌훌 떠 마시고 나면 상황이야 하등 달라질 것이 없다 하여도 얼마간 견디고 버텨낼 힘이 생겨나는 듯하다.
일 년 중에 가장 달콤한 날, 오늘은 낭만적인 사랑의 이벤트가 넘치는 밸런타인데이다. 새삼스레 이십여 년 전 배운 도덕 교과서의 논지를 들고 나서서, 우리에게는 우리의 문화가 있으니 서양 문화를 비판 없이 함부로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는 주장을 펼칠 생각은 없다. 초중고 해외 조기 유학생만 2만명이 넘고 해마다 언어연수를 떠나는 사람만 3천명이 넘어가는 현실에서는 진지하게 너무나 진지하게 민족문화를 말하는 일마저 ‘오랑캐’를 향해 핏대를 세우던 개화기의 위정척사파처럼 공허하게 느껴진다. 문화는 물처럼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나니, 그것은 수준의 문제를 떠나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마음의 골을 타고 흐르는 취향과 가치의 문제일 테다. 그렇다고 얄팍한 상술에 의해 주도되는 ‘무슨무슨데이’의 조악함에 울분을 터뜨리기에도 이미 지쳤다. 우아하든 조악하든, 두텁든 얄팍하든 상품의 논리에 지배당하지 않고 자본주의 사회를 사는 방법이 있다면 가르쳐 달라. ‘X-파일’의 근거 없는 소문보다도 ‘우리를 상품으로 보지 말라’고 외치는 연예인들이 더 황당하게 느껴지는 현실이 아닌가.
그 모든 정당하고 진지한 비판의 근거를 뒤로 젖혀두고, 나는 다만 얼마 전 들른 백화점 식품매장을 어슬렁거리며 느꼈던 아주 사소한 비애를 말하고 싶다. 때마침 한 공간 안에 분리된 매장 한쪽에는 설 제수용품을 준비하는 주부들이 잔뜩 몰려 있고, 다른 한쪽에는 밸런타인데이 초콜릿을 고르는 젊은 여성들이 가득했다. 어느 민속연구자의 말대로 축제가 ‘제의와 유희라는 두 축으로 움직이는 수레’라면, 지금 우리의 축제는 제의 따로, 유희 따로 굴러가는 외바퀴 수레에 다름 아니다. 자연의 은혜에 감사하며 죽음을 위로하고 삶을 축복하는 순정한 제의, 웃음과 땀으로 화합하는 질펀한 공동체의 오락, 사회적 차별과 규제로부터 일시적으로 벗어나 광장의 평등을 누리는 해방의 놀이판, 우리에게 과연 그런 축제가 있는가?
그 외바퀴 수레의 위태로운 행보 한가운데 명절 증후군을 앓는 주부들과 낭만적인 사랑의 환상에 사로잡힌 젊은 여성들이 있다. 밸런타인데이의 기원이 로마 황제의 결혼 금지령에 맞서 몰래 결혼식을 올려주다가 순교한 성 밸런타인 사제에게서 유래된 것이라면, 연인에게 달콤한 초콜릿을 건네는 여성들의 심중에는 사랑의 결실이 곧 결혼이라는 오래된 환상이 자리 잡고 있을 테다. 그리하여 ‘사랑’ 때문에 주부들은 하루 종일 쪼그려 앉아 제물을 마련하고 가족의 화합보다는 갈등이 더욱 선연히 드러나는 괴로운 명절을 묵묵히 견딘다. 가상의 공간 속에 둥지를 틀고 남들과 ‘일촌’을 맺어서라도 자기를 확인하고픈 젊은 여성들은 포장된 선물로 ‘사랑’을 약속하려 한다. 그들은 지금 백화점 매대를 사이에 두고 대치해 있지만, 동시에 같은 환상에 사로잡힌 채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의 밸런타인은 ‘사랑해서 결혼한다’기보다 여전히 ‘결혼해서 효도하고’ 싶어 한다. 여성들은 사랑 때문에 또다시 불평등해진다.
날로 거창해지고 화려해지는 초콜릿 포장을 보노라니 여성들이 결혼한 이후의 사회적 지위가 낮은 사회일수록 결혼식과 웨딩드레스가 거창하고 화려하다는 속설이 떠오른다. 선물을 건네고픈 상대도 없이 나도 덩달아 쫓긴 듯 홀린 듯 초콜릿 한 박스를 샀다. 중독 된 듯 한 박스를 다 까먹고 나니 속이 쓰리다. 시커먼 초콜릿은 달콤하면서도 씁쓸하다.
김별아/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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