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제물포고 교감 우리의 토론과 대화의 문화에서는 자신의 생각을 바꾸어 타인의 의견에 동조하는 것을 수치스럽고 줏대 없는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이는 잘못된 생각이고 유아적인 사고다. 자신의 생각을 바꾼다는 것은 종합적이고 분석적인 판단능력의 소산이다. 또한 정서적인 측면에서도 자존심을 버리고 생각을 바꾸기까지는 진정한 용기의 결과이기도 하다. 고집스럽게 자신의 생각을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적인 판단에 의해서 합리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바꾸는 행위야말로 미움 받을 용기를 넘어서는 큰 용기의 결단이기도 하다. 파커 J 파머는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에서 오늘날 민주주의에서 ‘비통한 자들’이 되어버린 우리들에게, ‘부서져 흩어지는’ 것이 아니라 ‘부서져 열리는’ 마음을 요구한다. 나의 마음을 부숴버린 타자에게 응대하기 위해서는 나의 신념과 타자의 신념이 충돌하여 일어난 모순과 긴장을 가슴속에 품고 더 크고 넓은 해결책으로 나아가야 한다. 역으로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생각을 바꾸고 순간의 인기주의에 빠져서 합리적인 이성의 판단을 상실한 채 소아적이고 병적인 집착을 보이는 사람들을 주시할 때는 이것이 과연 열린 마음인지 쉽게 동의하기 어렵다. 우리나라의 각종 토론 현장을 보자. 토론자들은 대화하러 나온 민주주의자가 아니라 모두 ‘빠떼루’(파르테르) 자세를 취하고 있는 레슬러 같다. 한쪽은 ‘빠떼루’ 자세로 바닥에 사지를 붙이고 바짝 엎드려 떨어지지 않으려 하고, 상대쪽은 그를 바닥에서 떼어내 뒤집으려고 한다. 바닥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자와 그것을 들어 뒤집으려는 자, 이것이 오늘날 우리의 토론과 대화의 모습이다. 역사적으로 줏대 없이 생각을 바꾸어 지탄의 대상이 된 많은 정치인과 지식인이 있었다. 일제에 통째로 국가를 내다 판 매국노 정치인들이 그랬고, 한때 우수한 문필가들이 평소의 가치관과 철학을 내버리고 일제가 영원히 이 땅을 통치하리란 착각으로 어느 순간부터 노골적으로 일제에 협조하고 심지어 천황의 들러리가 되어 충성을 독려하는 메신저 역할을 했던 것이 좋은 사례이다. 군부독재 시절엔 지식인을 자처하는 수많은 언론인, 교수들이 자신의 출세와 영달을 위해 어용을 했던 것도 역사는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생각 바꾸기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심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민주주의 시대는 다르다. 일전에 ‘편안한 교복’이라는 제1호 의제로 서울시교육청에서 숙의민주주의 방식으로 공론화가 진행됐다. 추첨으로 선정된 229명의 시민참여단은 다양한 방식으로 온종일 토론했다. ‘교복 결정 시, 학생 의견 반영 비율’에 대해 토론 후에 생각을 바꿨다는 시민참여단이 64%나 됐다. 그렇다. 민주주의는 이렇게 생각의 변화 가능성이 있어야 한다. 이는 소위 ‘부서져 열리는 마음’의 증표인 것이다. ‘우물 안의 개구리’란 말처럼 좁고 편협한 사고와 신념으로 마치 세상의 전부를 품은 것처럼 인식하는 것은 본인뿐만 아니라 공동체에도 불행의 소치이다. 나와 타인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사고의 흐름에 부응하지 못하고 변화를 꺼리며 집단과 자신의 이익에만 집착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장애물이다. 이제 ‘생각 바꾸기의 가능성’이 없는, ‘체제와 제도의 집합체로서만 존재하는 민주주의’는 어떤 감동도 주지 못한다. 생각 바꾸기는 패배가 아니다. 토론 이후에 생각을 바꾼 64%는 부서져 열린 마음을 소유한 진정한 민주시민이다.
왜냐면 |
[왜냐면] 토론하기와 생각 바꾸기의 가능성에 관하여 / 전재학 |
인천 제물포고 교감 우리의 토론과 대화의 문화에서는 자신의 생각을 바꾸어 타인의 의견에 동조하는 것을 수치스럽고 줏대 없는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이는 잘못된 생각이고 유아적인 사고다. 자신의 생각을 바꾼다는 것은 종합적이고 분석적인 판단능력의 소산이다. 또한 정서적인 측면에서도 자존심을 버리고 생각을 바꾸기까지는 진정한 용기의 결과이기도 하다. 고집스럽게 자신의 생각을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적인 판단에 의해서 합리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바꾸는 행위야말로 미움 받을 용기를 넘어서는 큰 용기의 결단이기도 하다. 파커 J 파머는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에서 오늘날 민주주의에서 ‘비통한 자들’이 되어버린 우리들에게, ‘부서져 흩어지는’ 것이 아니라 ‘부서져 열리는’ 마음을 요구한다. 나의 마음을 부숴버린 타자에게 응대하기 위해서는 나의 신념과 타자의 신념이 충돌하여 일어난 모순과 긴장을 가슴속에 품고 더 크고 넓은 해결책으로 나아가야 한다. 역으로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생각을 바꾸고 순간의 인기주의에 빠져서 합리적인 이성의 판단을 상실한 채 소아적이고 병적인 집착을 보이는 사람들을 주시할 때는 이것이 과연 열린 마음인지 쉽게 동의하기 어렵다. 우리나라의 각종 토론 현장을 보자. 토론자들은 대화하러 나온 민주주의자가 아니라 모두 ‘빠떼루’(파르테르) 자세를 취하고 있는 레슬러 같다. 한쪽은 ‘빠떼루’ 자세로 바닥에 사지를 붙이고 바짝 엎드려 떨어지지 않으려 하고, 상대쪽은 그를 바닥에서 떼어내 뒤집으려고 한다. 바닥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자와 그것을 들어 뒤집으려는 자, 이것이 오늘날 우리의 토론과 대화의 모습이다. 역사적으로 줏대 없이 생각을 바꾸어 지탄의 대상이 된 많은 정치인과 지식인이 있었다. 일제에 통째로 국가를 내다 판 매국노 정치인들이 그랬고, 한때 우수한 문필가들이 평소의 가치관과 철학을 내버리고 일제가 영원히 이 땅을 통치하리란 착각으로 어느 순간부터 노골적으로 일제에 협조하고 심지어 천황의 들러리가 되어 충성을 독려하는 메신저 역할을 했던 것이 좋은 사례이다. 군부독재 시절엔 지식인을 자처하는 수많은 언론인, 교수들이 자신의 출세와 영달을 위해 어용을 했던 것도 역사는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생각 바꾸기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심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민주주의 시대는 다르다. 일전에 ‘편안한 교복’이라는 제1호 의제로 서울시교육청에서 숙의민주주의 방식으로 공론화가 진행됐다. 추첨으로 선정된 229명의 시민참여단은 다양한 방식으로 온종일 토론했다. ‘교복 결정 시, 학생 의견 반영 비율’에 대해 토론 후에 생각을 바꿨다는 시민참여단이 64%나 됐다. 그렇다. 민주주의는 이렇게 생각의 변화 가능성이 있어야 한다. 이는 소위 ‘부서져 열리는 마음’의 증표인 것이다. ‘우물 안의 개구리’란 말처럼 좁고 편협한 사고와 신념으로 마치 세상의 전부를 품은 것처럼 인식하는 것은 본인뿐만 아니라 공동체에도 불행의 소치이다. 나와 타인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사고의 흐름에 부응하지 못하고 변화를 꺼리며 집단과 자신의 이익에만 집착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장애물이다. 이제 ‘생각 바꾸기의 가능성’이 없는, ‘체제와 제도의 집합체로서만 존재하는 민주주의’는 어떤 감동도 주지 못한다. 생각 바꾸기는 패배가 아니다. 토론 이후에 생각을 바꾼 64%는 부서져 열린 마음을 소유한 진정한 민주시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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