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토쓰바시대학 아카데미(동문모임) 총무 최근 세대갈등론이 언론의 조명을 받고 있다. 이철승 서강대 교수의 <불평등의 세대>로 인해 촉발된 세대갈등론은 보수·진보를 가리지 않고 언론의 조명을 받고 있다. <한겨레>도 최근 저자와의 인터뷰를 실었다. 미국에서 귀국한 지 얼마 안 돼 한국 실정에 밝다고 할 수 없는 한 교수의 주장에 이토록 귀를 기울이는 이유가 무엇인지 의구심이 든다. 이런 세대갈등론은 그 기만성이 입증된 주장이다. 자본주의의 모순을 세대갈등으로 바꿔치기하여 희석시키려는 시도는 과거에도 있었다. 자식의 일자리를 아버지가 빼앗는다는 단순한 논리는 언뜻 그럴듯하게 보이지만 사회경제적 문제를 ‘노노 갈등’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으로, 자본의 책임에 면죄부를 주는 논리다. 보수언론은 그렇다고 쳐도 진보언론마저 이런 철 지난 주장을 소개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묻고 싶다. 386세대가 기득권이라는 생각 자체가 팩트가 아니다. 물론 386세대 중에 기득권을 누리는 이들이 상대적으로 많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이 연령적으로 볼 때 한국 사회의 기득권적 지위를 누릴 시기를 맞이했기 때문이라 하겠다. 그런 논리로 치면 10년 전에는 475세대가 그러한 비난의 대상일 것이고 10년이 지나면 297세대로 바뀔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바뀌는 기득권층을 단지 세대라는 잣대로 판단하는 것 자체가 문제다. 더구나 386세대의 대다수는 기득권층이 아니다. 38선, 45정, 56도라는 말로 알 수 있듯이 386세대 가운데 대기업 정규직인 사람들의 비율은 10%도 안 될 것이다. 대다수는 중소기업에서 근무하는 비기득권층이고 대기업에서 일한 사람들도 대부분은 명예퇴직 등으로 일터를 나왔다. 386의 8은 대학의 학번을 의미하는데 당시 대학진학률이 30% 안팎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386세대의 기득권이란 애초부터 한정된 사람들의 것이었다. 오히려 386세대 내에 존재하는 기득권층과 비기득권층의 차이가 더 크게 부각돼야 하고 이는 한국 자본주의의 모순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하는데, 하나의 세대를 모두 기득권으로 치부하는 것은 명백한 오류다. 그렇다고 젊은층이 모두 희생자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임금격차가 엄청나서 같은 세대 내에서도 차이가 두드러지는 상황이다. 모든 젊은 세대가 희생자라는 식의 판단도 오류다. 단군 이래 최고의 스펙을 자랑하지만 그들이 쌓은 스펙이 누구의 지원으로 가능했는지 생각하면 젊은 세대가 희생자라는 논리는 더욱더 어불성설이다. 민주화와 산업화의 전선에서 오늘의 대한민국을 이룬 386세대를 그저 기득권에 안주하는 ‘괴물’로 만든다고 해서 대한민국의 사회적 갈등이 해소될 거라는 이철승 교수의 순진함에 언론이 동조하고 나서는 이유를, 386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묻고 싶다. 이런 낡고 기만적인 세대갈등론에 휘둘리지 않기를 386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간절히 바란다.
왜냐면 |
[왜냐면] 다시 고개 드는 세대갈등론에 관하여 / 양의모 |
히토쓰바시대학 아카데미(동문모임) 총무 최근 세대갈등론이 언론의 조명을 받고 있다. 이철승 서강대 교수의 <불평등의 세대>로 인해 촉발된 세대갈등론은 보수·진보를 가리지 않고 언론의 조명을 받고 있다. <한겨레>도 최근 저자와의 인터뷰를 실었다. 미국에서 귀국한 지 얼마 안 돼 한국 실정에 밝다고 할 수 없는 한 교수의 주장에 이토록 귀를 기울이는 이유가 무엇인지 의구심이 든다. 이런 세대갈등론은 그 기만성이 입증된 주장이다. 자본주의의 모순을 세대갈등으로 바꿔치기하여 희석시키려는 시도는 과거에도 있었다. 자식의 일자리를 아버지가 빼앗는다는 단순한 논리는 언뜻 그럴듯하게 보이지만 사회경제적 문제를 ‘노노 갈등’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으로, 자본의 책임에 면죄부를 주는 논리다. 보수언론은 그렇다고 쳐도 진보언론마저 이런 철 지난 주장을 소개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묻고 싶다. 386세대가 기득권이라는 생각 자체가 팩트가 아니다. 물론 386세대 중에 기득권을 누리는 이들이 상대적으로 많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이 연령적으로 볼 때 한국 사회의 기득권적 지위를 누릴 시기를 맞이했기 때문이라 하겠다. 그런 논리로 치면 10년 전에는 475세대가 그러한 비난의 대상일 것이고 10년이 지나면 297세대로 바뀔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바뀌는 기득권층을 단지 세대라는 잣대로 판단하는 것 자체가 문제다. 더구나 386세대의 대다수는 기득권층이 아니다. 38선, 45정, 56도라는 말로 알 수 있듯이 386세대 가운데 대기업 정규직인 사람들의 비율은 10%도 안 될 것이다. 대다수는 중소기업에서 근무하는 비기득권층이고 대기업에서 일한 사람들도 대부분은 명예퇴직 등으로 일터를 나왔다. 386의 8은 대학의 학번을 의미하는데 당시 대학진학률이 30% 안팎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386세대의 기득권이란 애초부터 한정된 사람들의 것이었다. 오히려 386세대 내에 존재하는 기득권층과 비기득권층의 차이가 더 크게 부각돼야 하고 이는 한국 자본주의의 모순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하는데, 하나의 세대를 모두 기득권으로 치부하는 것은 명백한 오류다. 그렇다고 젊은층이 모두 희생자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임금격차가 엄청나서 같은 세대 내에서도 차이가 두드러지는 상황이다. 모든 젊은 세대가 희생자라는 식의 판단도 오류다. 단군 이래 최고의 스펙을 자랑하지만 그들이 쌓은 스펙이 누구의 지원으로 가능했는지 생각하면 젊은 세대가 희생자라는 논리는 더욱더 어불성설이다. 민주화와 산업화의 전선에서 오늘의 대한민국을 이룬 386세대를 그저 기득권에 안주하는 ‘괴물’로 만든다고 해서 대한민국의 사회적 갈등이 해소될 거라는 이철승 교수의 순진함에 언론이 동조하고 나서는 이유를, 386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묻고 싶다. 이런 낡고 기만적인 세대갈등론에 휘둘리지 않기를 386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간절히 바란다.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