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마민주항쟁진상규명위원회 상임위원 올해로 부마민주항쟁 40년을 맞이했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국민들이 부마민주항쟁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부산·경남의 국민들은 좀 나은 편이지만 나머지 지역에 사는 국민들은 이름조차 생소하게 여기는 분들이 많다. 왜 그렇게 됐을까? 1979년 10월16일, 부산에서 터져 나와 마산(현 창원시)으로 옮겨 붙은 부마민주항쟁의 불길은 유신체제라는 철옹성을 단숨에 불태울 기세로 타올랐다. 부마민주항쟁은 국민 위에 군림하던 유신체제를 정면으로 거부한 시민항쟁이었다. 수만명의 학생,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유신 철폐! 독재 타도!”를 외쳤고 파출소, 경찰서, 관공서, 세무서 등을 파괴했다. 그러나 유신헌법에 대한 일체의 비판을 억압한 긴급조치 9호가 시행되었던 시절이라 언론은 부마항쟁을 제대로 보도하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흉흉한 소문과 유언비어들만 떠돌아다녔고 국민들은 사태의 진상을 알 수 없었다. 유신정권은 부산에 계엄령을, 마산에 위수령을 선포하여 군사력으로 항쟁을 진압했다. 하지만 부마항쟁을 목도한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은 이 사태가 부산과 마산에 그치지 않고 전국적으로 확산될 것으로 봤고 근본 대책을 박정희 대통령에게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10월26일 박 대통령을 암살하기에 이른다. 뒤이어 전두환 일파의 12·12쿠데타가 일어났고 잇달아 5·18광주민중항쟁이란 참극이 발생하면서 5·18 진상 규명이 더 급한 과제가 됐다. 물론 5·18민중항쟁은 부마민주항쟁에 비하면 사상자의 규모나 시민들이 겪은 고통의 강도가 더욱 심각했다. 하지만 부마민주항쟁이 없었으면 10·26사건도, 유신체제의 붕괴도, 5·18항쟁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 뜻에서 부마항쟁은 유신체제를 마감하고 민중항쟁의 시대를 여는 위대한 역사였다. 긴급조치 9호로 가려지고, 10·26사건으로 묻히고, 5·18 진상 규명이 더 급해서 미루어졌던 부마항쟁의 진상 규명이 지금 진행되고 있다. 부산과 마산의 거리에서 행해졌던 군경의 무자비한 진압과 용공의 굴레를 씌우려고 가했던 폭력과 고문에 망가진 선량한 시민들은 아직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고통 속에 살아가고 있다. 위에 든 이유들로 인해 부마민주항쟁이라는 위대한 역사를 우리 국민들은 충분히 알고 있지 못하다. 아니 알 수 있는 기회를 빼앗겨 버렸다. 그 기억을 되찾아야 한다. 우리가 역사를 기억하려는 이유는 과거의 교훈을 되새겨 미래에 또다시 아픈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함이다.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4개의 항쟁이 있었다. 4월혁명, 부마민주항쟁, 5·18민중항쟁, 6월민주항쟁을 일컫는다. 그 항쟁의 역사가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나라의 현실은 많이 달라져 있었을 것이다. 그 가운데 아직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지 못한 유일한 사건이 부마민주항쟁이다. 수년 전부터 많은 논의와 60만 부산·창원 시민들의 서명 등을 통해, 최근 부마민주항쟁 국가기념일 지정을 위한 관련 규정 개정이 추진되고 있다. 오는 10월16일 부마민주항쟁 40주년 기념일은 국가기념일로 맞게 되길 간절히 염원한다.
왜냐면 |
[왜냐면] 부마민주항쟁 국가기념일 지정에 부쳐야 / 차성환 |
부마민주항쟁진상규명위원회 상임위원 올해로 부마민주항쟁 40년을 맞이했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국민들이 부마민주항쟁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부산·경남의 국민들은 좀 나은 편이지만 나머지 지역에 사는 국민들은 이름조차 생소하게 여기는 분들이 많다. 왜 그렇게 됐을까? 1979년 10월16일, 부산에서 터져 나와 마산(현 창원시)으로 옮겨 붙은 부마민주항쟁의 불길은 유신체제라는 철옹성을 단숨에 불태울 기세로 타올랐다. 부마민주항쟁은 국민 위에 군림하던 유신체제를 정면으로 거부한 시민항쟁이었다. 수만명의 학생,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유신 철폐! 독재 타도!”를 외쳤고 파출소, 경찰서, 관공서, 세무서 등을 파괴했다. 그러나 유신헌법에 대한 일체의 비판을 억압한 긴급조치 9호가 시행되었던 시절이라 언론은 부마항쟁을 제대로 보도하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흉흉한 소문과 유언비어들만 떠돌아다녔고 국민들은 사태의 진상을 알 수 없었다. 유신정권은 부산에 계엄령을, 마산에 위수령을 선포하여 군사력으로 항쟁을 진압했다. 하지만 부마항쟁을 목도한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은 이 사태가 부산과 마산에 그치지 않고 전국적으로 확산될 것으로 봤고 근본 대책을 박정희 대통령에게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10월26일 박 대통령을 암살하기에 이른다. 뒤이어 전두환 일파의 12·12쿠데타가 일어났고 잇달아 5·18광주민중항쟁이란 참극이 발생하면서 5·18 진상 규명이 더 급한 과제가 됐다. 물론 5·18민중항쟁은 부마민주항쟁에 비하면 사상자의 규모나 시민들이 겪은 고통의 강도가 더욱 심각했다. 하지만 부마민주항쟁이 없었으면 10·26사건도, 유신체제의 붕괴도, 5·18항쟁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 뜻에서 부마항쟁은 유신체제를 마감하고 민중항쟁의 시대를 여는 위대한 역사였다. 긴급조치 9호로 가려지고, 10·26사건으로 묻히고, 5·18 진상 규명이 더 급해서 미루어졌던 부마항쟁의 진상 규명이 지금 진행되고 있다. 부산과 마산의 거리에서 행해졌던 군경의 무자비한 진압과 용공의 굴레를 씌우려고 가했던 폭력과 고문에 망가진 선량한 시민들은 아직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고통 속에 살아가고 있다. 위에 든 이유들로 인해 부마민주항쟁이라는 위대한 역사를 우리 국민들은 충분히 알고 있지 못하다. 아니 알 수 있는 기회를 빼앗겨 버렸다. 그 기억을 되찾아야 한다. 우리가 역사를 기억하려는 이유는 과거의 교훈을 되새겨 미래에 또다시 아픈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함이다.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4개의 항쟁이 있었다. 4월혁명, 부마민주항쟁, 5·18민중항쟁, 6월민주항쟁을 일컫는다. 그 항쟁의 역사가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나라의 현실은 많이 달라져 있었을 것이다. 그 가운데 아직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지 못한 유일한 사건이 부마민주항쟁이다. 수년 전부터 많은 논의와 60만 부산·창원 시민들의 서명 등을 통해, 최근 부마민주항쟁 국가기념일 지정을 위한 관련 규정 개정이 추진되고 있다. 오는 10월16일 부마민주항쟁 40주년 기념일은 국가기념일로 맞게 되길 간절히 염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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