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립대 도시인문학연구소 교수 학교 게시판에 대자보가 붙었다. 학생들이 교정 한쪽에 퀴어 부스를 마련했는데 교수 한 분이 이 부스를 향해 이틀이나 기도를 하고 갔다고 한다. 부스에 있던 학생들은 불쾌와 분노를 느꼈으나 그 교수는 사랑의 기도였다고 답한다. 나는 그 교수가 사랑으로 기도했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자식처럼 학생들을 사랑했을 것이다. 그러나 부스에 있던 학생들에게 그 ‘사랑’은 목에 가시처럼 박혔다. 사랑은 그 원래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상처만 남긴 것이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우리는 처음부터 타인의 사랑 없이 존재하지 못한다. “우리 아기, 착하지, 나는 너를 사랑한단다.” 아이는 이런 말과 함께 어른들의 세계로 초대된다. 여기서 사랑은 규범의 문제이자 생존의 문제다. 아이는 타인의 규범을 인정하고 ‘착한’ 사람이 됨으로써 사랑뿐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확증받는다. 이 관계 안에서 나와 타인은 규범을 공유하며, 이런 점에서 사랑은 동일한 것의 반복이자 확증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사랑은 일반적인 사회관계에서는 적용될 수 없다. 일반적으로 사회관계는 아이와 어른의 관계도 아니며 사회 구성원들은 동일한 규범을 공유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규범을 갖는 성인들에게 “착하지, 나는 너를 사랑한단다”는 통할 리가 없다. 더욱이 한 사회의 구성원들은 서로 다른 종교, 민족, 생각, 역사를 가지고 있는 타인이다. 현대사회는 전혀 알 수 없는 ‘낯선’ 타인들이 이웃이 되는 곳이다. 이런 시공간에서 ‘착한 ㄱ’ ‘예쁜 ㄴ’ 등과 같은 칭찬은 오히려 타인에게 굴욕감을 안겨줄 수 있다. 그것은 동등한 지위를 갖는 타인의 존재와 가치관을 부정하는 행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반적 사회관계의 주된 원리는 사랑이 아니라 권리의 존중이 된다. 그렇다면 권리를 존중하면서도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인가? 불가능하다기보다는 매우 어려워 보인다. 독일의 철학자 슈테판 마예차크가 소환하고 있는 성경에 나오는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생각해 보자. 이 이야기에서 사마리아인이 사랑한 이웃은 친근한 옆집 사람이 아니다. 사마리아인이 사랑한 이웃은 그 정체를 전혀 알 수 없는, 도적떼들에게 죽도록 폭행당한 채 길가에 쓰러져 있는, 곤경에 처한 이방인이다. 예수가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했을 때 그 말은 낯선 자에 대한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곤경에 처한 이웃을 지나치지 말며, 그 타자가 존재할 수 있도록 하라는 것이다. 여기서 타자에 대한 사랑은 동일성이 아니라 타자성의 확인이다. 사랑은 자기 안의 두려움을 이겨내고 그 낯선 타자가 자신의 이웃이 되도록 하는 일이다. 오늘날 성소수자들은 특히 익명으로 진행되는 온라인 공간에서 노골적으로 배제된다. 낯설다는 이유로 배제되고, 배제되었기 때문에 낯설게 되는 악순환의 연속이다. 서울시립대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동아리 모임 ‘퀴어시대’가 올린 두번째 입장문이 공유되지도 못하는 등 아예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통로가 단절되었다는 소식이 들린다. 퀴어시대는 목소리를 내기 위해 오프라인에서의 대자보 운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이렇듯 권리 존중도 기대하기 어려운 현실에서 우리는 이웃에 대한 사랑을 나눌 수 있을까? 너무 어렵다면 차라리 사랑하지 말 것을 당부하고 싶다. 사랑이 아니라 권리 존중을 하라고 당부하고 싶다. 그러나 한 발 더 나아가 정말로 낯선 이웃을 사랑하고자 한다면 자기 안의 두려움을 이겨내는 사랑, 타인의 권리를 존중하는 사랑을 하자고 말하고 싶다. 다를 수 있는 타인의 권리를 존중하지 않는 사랑은 타자를 고통스럽게 할 것이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왜냐면 |
[왜냐면] 당신의 사랑이 고통스러운 이유 / 이현재 |
서울시립대 도시인문학연구소 교수 학교 게시판에 대자보가 붙었다. 학생들이 교정 한쪽에 퀴어 부스를 마련했는데 교수 한 분이 이 부스를 향해 이틀이나 기도를 하고 갔다고 한다. 부스에 있던 학생들은 불쾌와 분노를 느꼈으나 그 교수는 사랑의 기도였다고 답한다. 나는 그 교수가 사랑으로 기도했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자식처럼 학생들을 사랑했을 것이다. 그러나 부스에 있던 학생들에게 그 ‘사랑’은 목에 가시처럼 박혔다. 사랑은 그 원래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상처만 남긴 것이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우리는 처음부터 타인의 사랑 없이 존재하지 못한다. “우리 아기, 착하지, 나는 너를 사랑한단다.” 아이는 이런 말과 함께 어른들의 세계로 초대된다. 여기서 사랑은 규범의 문제이자 생존의 문제다. 아이는 타인의 규범을 인정하고 ‘착한’ 사람이 됨으로써 사랑뿐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확증받는다. 이 관계 안에서 나와 타인은 규범을 공유하며, 이런 점에서 사랑은 동일한 것의 반복이자 확증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사랑은 일반적인 사회관계에서는 적용될 수 없다. 일반적으로 사회관계는 아이와 어른의 관계도 아니며 사회 구성원들은 동일한 규범을 공유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규범을 갖는 성인들에게 “착하지, 나는 너를 사랑한단다”는 통할 리가 없다. 더욱이 한 사회의 구성원들은 서로 다른 종교, 민족, 생각, 역사를 가지고 있는 타인이다. 현대사회는 전혀 알 수 없는 ‘낯선’ 타인들이 이웃이 되는 곳이다. 이런 시공간에서 ‘착한 ㄱ’ ‘예쁜 ㄴ’ 등과 같은 칭찬은 오히려 타인에게 굴욕감을 안겨줄 수 있다. 그것은 동등한 지위를 갖는 타인의 존재와 가치관을 부정하는 행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반적 사회관계의 주된 원리는 사랑이 아니라 권리의 존중이 된다. 그렇다면 권리를 존중하면서도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인가? 불가능하다기보다는 매우 어려워 보인다. 독일의 철학자 슈테판 마예차크가 소환하고 있는 성경에 나오는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생각해 보자. 이 이야기에서 사마리아인이 사랑한 이웃은 친근한 옆집 사람이 아니다. 사마리아인이 사랑한 이웃은 그 정체를 전혀 알 수 없는, 도적떼들에게 죽도록 폭행당한 채 길가에 쓰러져 있는, 곤경에 처한 이방인이다. 예수가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했을 때 그 말은 낯선 자에 대한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곤경에 처한 이웃을 지나치지 말며, 그 타자가 존재할 수 있도록 하라는 것이다. 여기서 타자에 대한 사랑은 동일성이 아니라 타자성의 확인이다. 사랑은 자기 안의 두려움을 이겨내고 그 낯선 타자가 자신의 이웃이 되도록 하는 일이다. 오늘날 성소수자들은 특히 익명으로 진행되는 온라인 공간에서 노골적으로 배제된다. 낯설다는 이유로 배제되고, 배제되었기 때문에 낯설게 되는 악순환의 연속이다. 서울시립대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동아리 모임 ‘퀴어시대’가 올린 두번째 입장문이 공유되지도 못하는 등 아예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통로가 단절되었다는 소식이 들린다. 퀴어시대는 목소리를 내기 위해 오프라인에서의 대자보 운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이렇듯 권리 존중도 기대하기 어려운 현실에서 우리는 이웃에 대한 사랑을 나눌 수 있을까? 너무 어렵다면 차라리 사랑하지 말 것을 당부하고 싶다. 사랑이 아니라 권리 존중을 하라고 당부하고 싶다. 그러나 한 발 더 나아가 정말로 낯선 이웃을 사랑하고자 한다면 자기 안의 두려움을 이겨내는 사랑, 타인의 권리를 존중하는 사랑을 하자고 말하고 싶다. 다를 수 있는 타인의 권리를 존중하지 않는 사랑은 타자를 고통스럽게 할 것이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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