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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5.01 17:48 수정 : 2019.05.02 13:55

박종수

서강대 겸임교수·전 주러시아 공사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을 만났다. 권력승계 뒤 최초의 만남이다. 복장을 비롯한 일거수일투족이 선대의 발자취를 답습하는 모양새다. 오른손을 코트 안에 넣는 것조차 김일성 주석을 닮았다. 하산역에 도착하자마자 “첫 행보일 뿐”이라는 첫마디로 유훈외교의 로드맵을 제시했다. 예상했던 대로 정상회담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다. 그동안 두 지도자가 주고받았던 선문선답을 기초로 첫 만남의 의미를 짚어본다.

첫째, 정상동맹이다. 푸틴은 30분 지각한 김정은을 정문까지 나와 따뜻하게 맞았다. 지각대장으로서 이례적인 태도다. 김정은은 사탕을 훔쳐 먹다 들통난 아이처럼 허둥대는 모습이다. 둘 모두 서방의 경제제재로 고통받는 동병상련의 처지다. 러시아는 크림반도 병합, 북한은 핵미사일 발사 때문이다. 수차례 해제를 요구했지만 제재 강도는 더 높아지고 있다. 미국의 제재가 북-러 관계를 밀착시키는 요인이다. 도널드 트럼프와 김정은 간 극한 설전이 오갈 때, 푸틴과 김정은은 ‘핵 외교전의 승리자’ ‘미국 패권의 견제자’로 덕담을 주고받았다.

둘째, 경제동맹이다. 미국의 대북제재에 비례해 북-러 간 경제협력도 강화되고 있다. 러시아는 북한의 생존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에너지를 공해상이나 제3국을 통해 공여해왔다. 식료품도 인도적 지원 품목으로 둔갑해서 북한에 반입됐다. 미국이 첨단위성으로 감시해도 야간에 운행되는 유개열차의 내부까지 추적할 수는 없다. 설령 인지했다고 해도 응징할 방법도 없다.

북-러 간 밀착관계는 2014년 소치겨울올림픽 직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러시아는 대북 채권 110억달러 중 90%를 탕감하고 10%를 북한 에너지 사업에 재투자하기로 했다. 경협의 최대 장애물이 제거된 셈이다. 주목되는 합의 내용은 루블화 결제다. 이는 미국 주도의 대북 금융제재를 피하고 러시아 주도의 유라시아경제연합(EAEU)에 편입시키려는 포석이었다. 2015년 7차 경제공동위에서는 국경에 인접한 하산역과 두만강역 통관 업무를 24시간 개방하는 데 합의했다. 양국 간 인적·물적 교류가 활발하다는 증거다. 60개의 협력사업 중 약 40%의 이행 실적을 과시했다. 한-러 정상회담 때 서명한 협력의향서(MOU)의 이행률 5%와 대조를 이룬다.

셋째, 군사동맹이다. 러시아와 북한의 주적은 미국이다. 미국도 ‘핵태세 검토 보고서 2018’에서 두 나라를 적으로 규정했다. 푸틴은 동맹국에 대한 핵무기 사용을 러시아에 대한 핵 공격으로 간주해 즉각 대응할 것임을 밝혔다. 두 나라는 2000년 2월 체결한 ‘우호·선린·협력조약’에 소련 당시의 ‘자동 군사 개입’과 유사한 조항을 삽입해 군사·안보적 연결고리를 복구했다.

소련 해체 직전까지 북한이 도입한 무기 90% 이상이 러시아제였고 무상공여 또는 우호 가격으로 거래됐다. 이런 관행은 현재도 지속되고 있다. 러시아가 2014년 나진항의 49년 사용권을 확보하면서 대형 선박의 안전을 명분으로 보조함대를 항구에 주둔시킬 수 있다. 또한 베트남에 100억달러 차관을 제공하는 대가로 깜라인만에 러시아 신형 항공모함이 기항할 수 있다. 블라디보스토크-나진-깜라인만 벨트를 구축했던 1984년의 군사관계를 연상시킨다. 이번 김정은 방러단 230명에는 리영길 군총참모장도 포함됐다.

러시아는 북핵 문제에 있어서 공여자, 관리자 및 피해자의 다중적 입장이다. 북-미 협상이 잘되기를 기대하면서도 6자회담 개최를 일관되게 주장해온 이유다. 지난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결렬은 러시아가 관여할 수 있는 명분을 제공한 셈이다. 미국의 대북 및 대러 제재가 지속되면 북한의 핵탄두를 러시아로 이관하면서 한반도 비핵화 이행을 전격 선언할 수도 있다. 이번 러시아 방문이 “첫 행보일 뿐”이라는 김 위원장의 발언을 곱씹어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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