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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4.29 17:41 수정 : 2019.04.29 19:05

올해 서울시를 중심으로 청년기본소득 실험이 제안되면서 기본소득 논의가 확대되었다. 청년기본소득을 비판하는 주장의 논리는, 청년이면 누구나 배당받을 수 있는 급여보다는 당장 빈곤한 청년에게 집중된 복지급여가 이들의 삶을 개선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복지제도를 ‘보완’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나는 이에 대해 반론을 제기해보겠다.

먼저 복지국가의 탄생부터 거슬러 올라가 보자. 20세기 초 유럽에서는 자본주의의 급속한 발전과 함께 자본가와 노동자 간의 불평등이 심각한 수준이 되었는데, 노동자계층을 대변하던 정당들은 심화되는 불평등한 구조를 개혁하기 위해 ‘복지국가’를 설계하였다. 사회정책이 이들의 전유물이던 이 시기를 복지국가 1기라 부른다. 그러나 오일쇼크에 이어 세계화와 금융자본주의, 서비스경제로의 진입 등으로 노동자계층과 이들의 정치집단들은 변화된 지형을 경험하게 되고, 복지국가는 2기에 들어선다. 1979년 집권한 영국의 대처 총리는 선별적인 방식으로 곧바로 복지제도를 수정하였는데, 이후 영국의 빈곤율은 실제로 감소했다. 하지만 불평등은 심화됐고 영국을 비롯한 유럽 복지국가들은 이제 3기에 진입했다고 분석되고 있다. 3기는 확대된 불평등과 복지쇼비니즘의 시기로, 우파 정당들은 이주민에게 배타적인 입장을 취하는 한편 자국민 대상으로는 포퓰리즘을 펼침으로써 지지율을 높이고 있다.

이제 ‘복지정책’은 불평등에 대한 대응인지 또 어느 정당이 내걸어야 할 현판인지도 모호해졌다. 그리고 심화되는 부의 불평등에 대해 많은 연구가 발표되고 있지만, 이를 개혁할 주체는 잘 보이지 않는다. 한국은 어떠한가? 우리나라는 제도적인 측면에서 약 30년 만에 압축적으로 복지국가를 발전시켰다. 하지만 소득과 부의 불평등은 현재 심각한 수준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상위권이다. 빈곤층의 소득수준만큼이나 중요한 지표는 우리나라 소득의 절반 이상을 상위 10%가 가져가고, 불평등한 분배가 지금도 확대되고 있다는 것이다.

기본소득은 복지국가의 보완재가 아니라, 불평등에 대항하기 위한 적극적인 정의실현 조처다. 디지털자본주의로의 진입으로 우리는 현재 새로운 형태의 불평등을, 임금 및 자산 불평등 같은 오래된 불평등과 동시에 경험하고 있다. 그리고 최근의 연구들은 한국의 청년세대가 이 불평등의 중심에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정의로운 분배를 위한 완전한 기본소득 실현에서 반드시 청년기본소득이 그 첫걸음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청년기본소득은 정의로운 분배를 위한 주체 형성과 연대에서 중요한 함의를 가질 수 있다.

높은 청년실업률과 더 좋은 가격 매김을 위한 경쟁으로 ‘비생산적’ 시간은 모두 기회비용인 청년에게, 늘어나는 주거비와 좁아진 취업문 때문에 우정과 사랑도 부담이 되는 청년에게, 그러나 무조건적 급여를 받을 자격은 가장 부족해 보이는 청년에게, 한쪽으로만 과도하게 그리고 끊임없이 축적되고 있는 부를 공유하여 기본소득으로 배당한다면? 그래서 이들이 인간은 다중활동의 존재라는 것을 조금씩 깨달을 수 있고, 좀 더 ‘여유’를 가지고 노조활동과 협동조합에 참여할 수 있다면? 지역사회와 공동체 그리고 정치참여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면? 무엇보다 우리 사회의 청년들이 자신의 정당한 배당과 사회권에 대해 인식하고, 헬조선에서 뜨고 싶다는 생각보다 이 사회의 불평등에 대항하겠다고 용기를 내볼 수 있다면?

나는 당장의 청년빈곤과 실업문제를 제쳐두고 한가롭게 로봇이 노동을 대체할 미래를 준비하자는 것이 아니다. 눈앞의 문제들과 함께, 저변에서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는 어쩌면 더 근본적인 문제를 우리가 같이 고민해보자는 것이다. 그리고 과도하게 한쪽으로 치우친 부와 권력에 대해 우리는 예민하게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최종 목적지는 정의로운 사회의 완전한 달성이라는 것을 명심하자는 것이다.

이승윤
이화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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