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대 보건과학대 교수 지난해 7월 서울 대한문 앞에는 두 개의 분향소가 세워졌습니다. 하나는 천안함 사건으로 숨진 46명의 용사를 추모하는 공간이었습니다. 그 오른쪽으로 두 걸음 떨어진 곳에는 2009년 해고 이후 화물차 운전과 일용직으로 근근이 생계를 유지하다 한달 전 세상을 떠난 쌍용차 해고노동자 김주중씨의 영정이 놓였습니다. 노란 리본을 달거나 태극기를 든 이들은 두 분향소를 찾아 비극적인 죽음을 애도했습니다. 하지만 두 곳을 동시에 찾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고작 두 걸음에 불과한 그 거리를 누구도 넘어서지 못했던 것입니다. 김주중씨의 분향소를 찾았던 저는 여러 차례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을 만나 정리해고가 준 상처를 기록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들은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습니다. 가까운 동료들과 그 가족이 세상을 떠나는 과정을 9년 동안 서른 차례나 지켜봤던 노동자들은 애써 고개를 돌려 말하곤 했습니다. “바뀌지도 않을 걸, 왜 상처를 또 후벼 팝니까.” 천안함 생존 장병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왜 6월에 오셨어요?” 지난해 <한겨레> <한겨레21>과 함께 천안함 생존 장병 연구를 하며 정주현 하사한테 들었던 질문입니다. 천안함 사건이 발생한 3월이면 정치인들이 찾아와 생존 장병과 사진을 찍어 가곤 했지만, 그 정치인을 다시 만나기는 어려웠습니다. 생존 장병들은 그렇게 반복된 희망고문 속에서 체념하는 법을 배워야 했습니다. 마지막 희망이었던 국가유공자 심사에서 떨어진 후 막막한 시간을 보내야 했던 정 하사는 말했습니다. “저를 어떻게 이용해도 좋아요. 우리가 이렇게 힘들다는 사실만 알려주세요.” 쌍용차 해고노동자와 천안함 생존 장병의 고통은 1년 전 대한문 앞에 놓였던 두 분향소의 거리만큼 가까웠습니다. 천안함 생존 장병 8명과 인터뷰를 하고 24명과 설문조사를 하며 알게 된 현실은 참혹했습니다. 생존 장병 대다수는 군대에서 ‘패잔병’이라고 비난받고, 사회에서는 그 낙인과 트라우마가 걸림돌이 되어 취업하지 못했습니다. 설문에 참여한 24명 중 지난 1년 동안 수면장애로 치료를 받은 이가 14명(58.3%), 외상후스트레스장애로 치료받은 이가 11명(45.8%)이었습니다. 사망한 46명은 용사로 불리며 국가유공자가 되었지만, 생존 장병 대다수는 ‘몸에 흔적이 남는 신체적 외상이 없다’는 이유로 국가유공자 신청에서 탈락했습니다. 9명(37.5%)은 1년 평균 세전 소득이 2000만원이 안 되는 빈곤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연구를 하며 2016년 진행했던 ‘세월호 참사 생존 학생 및 가족 연구’가 계속 떠올랐습니다. 천안함과 세월호는 4년의 시차를 두고 발생한 서로 다른 비극의 이름이지만, 두 사건을 대하는 한국 사회의 태도는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피해자들이 겪었을 고통을 위로하기보다는 비극이 가진 정치적 영향력을 먼저 계산하고 편을 나눠 싸웠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그 안타까운 죽음에 함께 조의를 표할 기회를 놓쳤고, 상처받은 당사자들의 몸과 마음은 줄곧 버려졌습니다. 때로는 방치를 넘어서 상처를 헤집는 잔인한 말과 행동이 부끄러움 없이 쏟아졌습니다. 타인의 고통을 대하는 한국 사회의 앙상한 실력이 그대로 드러난 셈입니다. 특히 천안함 생존 장병들은 ‘보수는 이용하고 진보는 외면했다’는 말처럼 모두로부터 고립된 채 오해를 받아왔습니다. 침묵하면 비겁하다고 욕을 했고, 용기를 내어 말하면 거짓을 말한다고 비난했습니다. 국가로부터는 어떤 보상도 받지 못한 채 자기 돈으로 트라우마를 치료해야 했지만, 엄청난 보상금을 받았을 것이라는 허황한 짐작만 주변에 나부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취임사에서 “보수와 진보의 갈등”을 끝내겠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 길을 걷는 것은 저 같은 책상물림이 짐작할 수 없는 어렵고 고된 일이겠지요. 하지만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그 꿈은 안타까운 죽음을 기억하고 살아남은 자들의 상처를 위로하는 것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습니다. 누구도 가보지 않은 그 여정에서 길을 잃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당장 눈에 보이는 이념적 갈등과 그 손익 계산에 앞서 아프다는 말조차 하지 못했던 이들의 고통에 귀 기울이며 그들의 손을 잡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오늘, 3월26일은 천안함 사건이 발생한 지 9년이 되는 날입니다. 그 비극의 이유가 무엇이건 국가를 지키다 상처 입은 이들을 지원하고 보호하는 일은 우리 모두의 몫이어야 합니다. 언제나 그렇듯 ‘사람이 먼저’여야 하니까요. 고백하자면 저 역시 지난해 7월 서울 대한문 앞에서 고작 그 두 걸음을 떼지 못했습니다. 이제 그 멀지 않은 거리를 함께 넘어섰으면 합니다. 그 어려운 걸음이 다음 세대에게 공동체의 비극 앞에 깊게 슬퍼하며 망설임 없이 함께 애도할 수 있는, 그래서 타인과 나의 고통이 사회의 품에서 치유되는 길을 마련해줄 것이라고 믿습니다.
왜냐면 |
[왜냐면] 쌍용차에서 천안함까지, 두 걸음의 거리 / 김승섭 |
고려대 보건과학대 교수 지난해 7월 서울 대한문 앞에는 두 개의 분향소가 세워졌습니다. 하나는 천안함 사건으로 숨진 46명의 용사를 추모하는 공간이었습니다. 그 오른쪽으로 두 걸음 떨어진 곳에는 2009년 해고 이후 화물차 운전과 일용직으로 근근이 생계를 유지하다 한달 전 세상을 떠난 쌍용차 해고노동자 김주중씨의 영정이 놓였습니다. 노란 리본을 달거나 태극기를 든 이들은 두 분향소를 찾아 비극적인 죽음을 애도했습니다. 하지만 두 곳을 동시에 찾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고작 두 걸음에 불과한 그 거리를 누구도 넘어서지 못했던 것입니다. 김주중씨의 분향소를 찾았던 저는 여러 차례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을 만나 정리해고가 준 상처를 기록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들은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습니다. 가까운 동료들과 그 가족이 세상을 떠나는 과정을 9년 동안 서른 차례나 지켜봤던 노동자들은 애써 고개를 돌려 말하곤 했습니다. “바뀌지도 않을 걸, 왜 상처를 또 후벼 팝니까.” 천안함 생존 장병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왜 6월에 오셨어요?” 지난해 <한겨레> <한겨레21>과 함께 천안함 생존 장병 연구를 하며 정주현 하사한테 들었던 질문입니다. 천안함 사건이 발생한 3월이면 정치인들이 찾아와 생존 장병과 사진을 찍어 가곤 했지만, 그 정치인을 다시 만나기는 어려웠습니다. 생존 장병들은 그렇게 반복된 희망고문 속에서 체념하는 법을 배워야 했습니다. 마지막 희망이었던 국가유공자 심사에서 떨어진 후 막막한 시간을 보내야 했던 정 하사는 말했습니다. “저를 어떻게 이용해도 좋아요. 우리가 이렇게 힘들다는 사실만 알려주세요.” 쌍용차 해고노동자와 천안함 생존 장병의 고통은 1년 전 대한문 앞에 놓였던 두 분향소의 거리만큼 가까웠습니다. 천안함 생존 장병 8명과 인터뷰를 하고 24명과 설문조사를 하며 알게 된 현실은 참혹했습니다. 생존 장병 대다수는 군대에서 ‘패잔병’이라고 비난받고, 사회에서는 그 낙인과 트라우마가 걸림돌이 되어 취업하지 못했습니다. 설문에 참여한 24명 중 지난 1년 동안 수면장애로 치료를 받은 이가 14명(58.3%), 외상후스트레스장애로 치료받은 이가 11명(45.8%)이었습니다. 사망한 46명은 용사로 불리며 국가유공자가 되었지만, 생존 장병 대다수는 ‘몸에 흔적이 남는 신체적 외상이 없다’는 이유로 국가유공자 신청에서 탈락했습니다. 9명(37.5%)은 1년 평균 세전 소득이 2000만원이 안 되는 빈곤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연구를 하며 2016년 진행했던 ‘세월호 참사 생존 학생 및 가족 연구’가 계속 떠올랐습니다. 천안함과 세월호는 4년의 시차를 두고 발생한 서로 다른 비극의 이름이지만, 두 사건을 대하는 한국 사회의 태도는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피해자들이 겪었을 고통을 위로하기보다는 비극이 가진 정치적 영향력을 먼저 계산하고 편을 나눠 싸웠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그 안타까운 죽음에 함께 조의를 표할 기회를 놓쳤고, 상처받은 당사자들의 몸과 마음은 줄곧 버려졌습니다. 때로는 방치를 넘어서 상처를 헤집는 잔인한 말과 행동이 부끄러움 없이 쏟아졌습니다. 타인의 고통을 대하는 한국 사회의 앙상한 실력이 그대로 드러난 셈입니다. 특히 천안함 생존 장병들은 ‘보수는 이용하고 진보는 외면했다’는 말처럼 모두로부터 고립된 채 오해를 받아왔습니다. 침묵하면 비겁하다고 욕을 했고, 용기를 내어 말하면 거짓을 말한다고 비난했습니다. 국가로부터는 어떤 보상도 받지 못한 채 자기 돈으로 트라우마를 치료해야 했지만, 엄청난 보상금을 받았을 것이라는 허황한 짐작만 주변에 나부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취임사에서 “보수와 진보의 갈등”을 끝내겠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 길을 걷는 것은 저 같은 책상물림이 짐작할 수 없는 어렵고 고된 일이겠지요. 하지만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그 꿈은 안타까운 죽음을 기억하고 살아남은 자들의 상처를 위로하는 것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습니다. 누구도 가보지 않은 그 여정에서 길을 잃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당장 눈에 보이는 이념적 갈등과 그 손익 계산에 앞서 아프다는 말조차 하지 못했던 이들의 고통에 귀 기울이며 그들의 손을 잡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오늘, 3월26일은 천안함 사건이 발생한 지 9년이 되는 날입니다. 그 비극의 이유가 무엇이건 국가를 지키다 상처 입은 이들을 지원하고 보호하는 일은 우리 모두의 몫이어야 합니다. 언제나 그렇듯 ‘사람이 먼저’여야 하니까요. 고백하자면 저 역시 지난해 7월 서울 대한문 앞에서 고작 그 두 걸음을 떼지 못했습니다. 이제 그 멀지 않은 거리를 함께 넘어섰으면 합니다. 그 어려운 걸음이 다음 세대에게 공동체의 비극 앞에 깊게 슬퍼하며 망설임 없이 함께 애도할 수 있는, 그래서 타인과 나의 고통이 사회의 품에서 치유되는 길을 마련해줄 것이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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