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2.25 18:33
수정 : 2019.02.26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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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21일 오전 서울 종로구 청와대 앞 분수대 광장에서 열린 ‘가압류당한 제주 녹지 국제병원’ 허가 철회 및 원희룡 지사 퇴진 촉구 기자회견.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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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21일 오전 서울 종로구 청와대 앞 분수대 광장에서 열린 ‘가압류당한 제주 녹지 국제병원’ 허가 철회 및 원희룡 지사 퇴진 촉구 기자회견.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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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제주에 봄이 오고 있습니다.” 지난해 제주 4·3항쟁 70주년 추념사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이렇게 선언했다. 제주시민들에게는, 특히 가족 중 희생자가 있는 시민들에게는 벅찬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과연 대통령의 선언처럼 제주에 ‘봄’이 도래한 것일까. 제주도민에게 ‘봄’이란 무엇이어야 하는가.
지난해 말 제주도가 다시 언론에 오르내렸다. 한겨울에 고대하던 ‘봄’ 소식과는 거리가 멀었다. 지난해 12월5일 원희룡 제주도지사는 두달 전 전달된 시민들의 ‘숙의’(숙의형 공론조사위원회의 개설 불허 의견)를 거스르고 중국 녹지(뤼디)그룹이 세운 ‘녹지병원’(47병상)의 최종 허가를 선언했다. 그 자리에서 “거짓말하지 마시라”며 항의하던 한 시민은 관계자에 의해 곧바로 끌려 나갔다. 그는 원희룡 도지사가 “일부에서 염려하시는 건강보험 등 국내 공공의료체계에는 영향이 없습니다”라고 한 말에 항의했다. 원희룡 도지사가 말한 ‘일부’에는 숙의형 공론조사위원회에 참여한 제주시민은 포함되지 않은 것인지, 공공의료체계를 도지사 한명이 책임지고 지킬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이었다. 그래서 제주 녹지병원 사태는 주목해야 한다. 경제 활성화라는 명분 아래 투자자한테 의료 영역의 문을 열어주고, 그로 인해 그나마 의료비 상승을 통제하고 있던 국민건강보험 체계가 민간 보험회사의 거대한 마케팅에 위협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반드시 주목해야만 한다. 제주, 그 청정 지역이 왜 대한민국을 <하얀 정글>(흰 가운을 입은 의사들의 이윤추구 경쟁을 비유한 다큐멘터리 제목·2011년 송윤희 감독)로 오염시키는 진원지가 되어버렸는가.
인류학자 아서 클라인먼은 ‘질병’을 넘어 ‘사회적 고통’에 주목해야 함을 주장해왔다. 그는 ‘의학’적 시선을 넘어 정치적, 경제적, 제도적 힘에 의해 초래된 복합적 결과물로서의 고통에 대해 이야기한다. 제주도의 ‘녹지병원’은 고급 의료서비스 제공을 지향할지 모르나, 그 설립 과정만으로도 시민들에게 커다란 사회적 고통을 초래하고 있다. 정치와 경제 논리에 의해 ‘병원’ 설립이 사회적 고통을 유발한 비근한 예가 있다. 2017년 9월5일 서울 강서지역 장애인특수학교를 요청하는 학부모들이 무릎을 꿇은 사진을 기억해보자. 2013년 11월 공진초등학교가 폐교된 자리에 서울시교육청이 특수학교 설립을 예고했음에도 자유한국당 김성태 의원이 지역주민에게 장애인특수학교 대신 ‘국립한방병원’을 설립하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다. 병원 설립이 가져다줄 경제적 이득 앞에 결국 장애인 학부모들은 자녀들의 학업권을 위해 무릎을 꿇었다. “저거 다 연기야”를 외치며 비난하는 지역주민들 사이로 김성태 의원은 ‘유유히’ 퇴장했다. 제주도지사의 녹지병원 허가 기자회견과 많은 부분 닮았다. 장애인의 몸은 지역의 경제적 가치(땅값)를 떨어뜨리는 불경한 존재다. 그 ‘땅’에는 이윤을 가져다줄 대형 병원과 의료소비자들만이 청결한 존재로 받아들여졌다. 마찬가지로 녹지병원이 설립된 제주의 서귀포시 헬스케어타운 ‘땅’ 안으로 불경한 제주도민과 공공의료시설은 들어갈 수 없다. 오직 47명의 외국인 환자(병상 기준)만이 신성스럽게 환대받는다.
지난 14일 예상됐던 것처럼 중국 녹지그룹은 ‘내국인 진료 제한’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원희룡 도지사가 ‘외국인’ 진료만을 허용했으니 공공의료체계 혼란은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지만, 한 시민의 ‘거짓말하지 말라’던 외침처럼 이제 법원의 판결에 따라 내국인 진료가 가능한 영리병원이 제주에 최초로 열릴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의료법상 개설을 허가한 시점에서 90일 이내에 개원을 하지 않으면 청문회를 통해 의료사업 허가를 취소할 수 있다. 3월4일이 바로 마지막 기한일이다. 현재까지 녹지병원에 고용된 의사는 한명도 없다. 하지만 개원이 취소되더라도 이후에 또 다른 법정다툼이 계속 이어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개원 허가 기한을 며칠 앞두고 시민들은 영리병원 반대를 위해 목청을 드높인다. 그럼에도 문제의 당사자인 원희룡 도지사가 ‘공정한 법의 심판’이라는 그늘 뒤에 숨는다면 어찌 처벌할 수 있겠는가. 이번 녹지병원 사태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도덕적 가치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한다는 점에서 의료의 영역을 넘어선다. 그래서 이제 마지막으로 다시 되묻고 싶다. “문재인 대통령님, 제주의 봄은 진정 올 수 있겠습니까? 제가 생각한 봄과 대통령님의 봄은 다른 것이었습니까?”
김관욱
의료인류학자·가정의학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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