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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1.16 18:05 수정 : 2019.01.17 09:36

박주민
국회의원·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

2009년 1월20일. 지방에 사건 수임 관련 회의를 하기 위해 내려갔던 날이다. 도착해서 역을 나오는데 대합실에 비치된 티브이에서는 불타는 남일당 건물이 반복적으로 비춰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밑으로 사망자의 수가 적힌 자막이 지나가는 모습은 지금도 눈앞에 생생하다. 서울에 도착해서 참사에 대해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철거민들이 망루를 채 다 짓기도 전에 경찰은 특공대 투입을 결정했고, 하루 만에 진압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는 가슴이 답답해졌던 기억이 있다. 이후 정부는 망루에 오른 철거민의 생계보장 요구를 ‘도심 테러’로 규정하였다. 많은 언론에서는 그런 정부의 입장을 그대로 혹은 확대해 보도할 뿐이었다. 심지어는 그와 반대되는 이야기를 꺼내거나 문제제기하는 단체도 같은 부류로 몰고 가기도 하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답답한 상황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지난해 9월 경찰청 인권침해 사건 진상조사위원회의 발표에 따르면 용산참사 당시 경찰청 수사국 등이 사이버요원 900명을 동원해 ‘댓글 공작’과 ‘인터넷 여론조사’에 가담했던 사실이 확인된 바 있다.

당시 용산참사의 진상을 밝히겠다고 나선 시민단체 활동가들 역시 수배를 당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은 용산참사 자체를 변호하는 팀과 용산참사와 관련하여 활동하는 사람들을 위한 팀을 각각 꾸렸었다. 두번째 팀은 용산참사와 관련된 내용을 널리 알리는 여러 기획도 담당하기로 하였다. 두번째 팀에 속했던 나는 활동가들 다수에 대한 변호와 함께 용산참사 국민법정의 준비를 맡았다. 참사의 원인 등에 대한 여러 의문점 등을 널리 알릴 필요가 있었는데 내용이 복잡하기도 하고 다루는 매체의 편향된 태도도 있어서 새로운 시도가 필요했다. 그래서 재판의 형식을 빌리되 시민배심원을 두고 쟁점들을 하나하나 짚어보는 국민법정을 하기로 하였다.

국민법정 준비에 투입된 변호사들은 다룰 내용을 정하고 그것을 검찰과 변호인의 서면 형식으로 만드는 작업을 하느라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다. 당일 생동감 있는 현장을 위해서, 시민배심원단의 보다 객관적인 판단을 얻어내기 위해 검찰팀과 변호인팀은 서로 내용을 공유하지 않고 각자의 내용을 준비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변호인팀이 된 나와 이재정 변호사는 국민검찰에 의해 기소될 서울지방경찰청 김석기 전 청장을 비롯한 당시 경찰 관계자, 이명박 당시 대통령, 오세훈 당시 서울시장 등을 변호하는 역할을 맡았다. 변호인 역할에 충실했던지 국민법정 중간 쉬는 시간에 자리에 앉아 있던 나를 용산참사 유족 중 한분이 지나가면서 보고 ‘참 못됐다’고 하는 것을 듣기도 했었다.

이제 10년이 되었다. 그동안 여러 노력이 있었지만 진상규명조차 다 마치지 못했다. 경찰이 화재 원인을 철거민의 화염병 투척으로 규정한 근거는 무엇인지, 유족 동의 없는 부검은 적절했는지, <소수의견>이라는 영화의 소재가 되기까지 한 검찰의 수사기록 은폐의 이유는 무엇인지 아직 명쾌히 밝혀진 것이 없다. 현재 대검찰청 과거사진상조사단이 용산참사에 관한 검찰의 수사와 공소 유지가 적절했는지 조사하고 있다. 용산참사 진상규명의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다. 그런데 용산참사 수사검사였던 전·현직 검사들이 조사단에 대하여 ‘민형사상 조치를 취하겠다’고 엄포를 놓으며 조사를 방해하고 있다고 한다. 이런 식이면 조사단에 파견된 까마득한 후배 검사들은 진상조사보고서를 제대로 쓸 수 없을 것이다. 10년 전 정부가 용산참사를 ‘도심 테러’로 일방적으로 규정한 것이 그 당시 수사검사들에 의해 반복되고 있는 것 같다. 10주기를 맞은 용산참사의 진상규명을 위해 재조사 대상자인 당시 수사검사들은 정정당당하게 조사에 임하고, 조사 과정에서 방어권을 행사하더라도 ‘상식 수준’에서 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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