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광역시 산곡고교 국어교사 최근 한 방송사의 <스카이(SKY) 캐슬> 드라마가 화제다. 이어 어떤 개그프로그램은 소위 명문대 이니셜로 된 이 ‘스카이’를 취소(해체)하겠다는 듯이 스카이 ‘캔슬’이라는 제목의 패러디극도 선보였다. 어쨌든 이 드라마는 입시경쟁교육이라는 숨막히는 소재로 정말 시청자들을 ‘숨막히게’ 만들고 있다. 그런데 시청자로서 이 드라마를 흥미진진하게 ‘소비’한다고 해서, 한편으로 대상화하여 경멸해 마지않던 그 ‘캐슬’이 우리 현실 속에서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절망감이 앞서는 건 왜일까. 만약 왜곡된 대한민국 교육이 바로잡혔으면 좋겠다는 것이 작가의 의도라면, 이를 위해 드라마 시청 이후 작가의 의도를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은 과연 없을까. 국어교사로서 혼신의 힘을 다해 아이들에게 국어와 문학을 17년간 가르쳐왔지만, 지나고 보니 입시경쟁의 손바닥 안에서 허우적대고 말았다는 자괴감은 결코 필자만의 것은 아닐 것이다. 잘못된 교육임이 분명한데 한편으로 ‘스카이 캐슬식 수업’이라며 홍보하는 학원도 있는 것이 현실이다. 공부를 잘했거나 못했거나 간에, 아이들이 자신의 적성에 맞는 직업(이 무엇이든)을 찾아 안전하고 행복하게 일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기성세대가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해주어야 하는 일이 아닐까. 그럼에도 열악하다 못해 죽음에 내몰리는 노동환경, 저임금에 시달리는 비정규직 등 취업난과 더불어 내몰리는 청년들의 신산한 삶은 변화가 없다. 이런 현실이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절망감 속에서 내 자식만은 고생시키지 않겠다는 부모로서의 선한(?) 마음이 왜곡된 경쟁교육을 부풀려왔다는 점에서 입시경쟁교육의 해소를 더욱 어렵게 한다. 이제는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정치인이나 대학 관계자 등에 대한 기대감도 저물어간다.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결국, ‘스카이’의 교육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그들로서는 그것을 해체할 그 어떤 의지도 갖고 있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답은 하나다. 2년 전 온전히 시민들이 들고 일어난 그 촛불혁명이 낡은 정치를 몰아냈듯, 이제는 촛불 ‘교육’혁명이 아니면 바뀌기 어려울 것 같다. 입시경쟁교육의 원인인 이른바 학벌사회의 타파를 위한 다양한 논의들이 그동안 없었던 것도 아니다. 서울대 폐지와 같은 고질적 학벌체계에 대한 해체 논의는 ‘국공립대 네트워크 구축’이나 프랑스나 독일 등이 시행하는 ‘대학평준화’ 등의 정책으로 담론화되어 있음에도 실천의 진척이 없을 따름이다. 이제 드라마 <스카이 캐슬>이 종영되고 나면, 우리가 나서야 한다. 더 이상 이런 비정상적인 교육이 계속될 수는 없다는 시민들의 목소리가 들불처럼 일어나야 한다. 어쩌면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기성세대 스스로 나름대로 가지고 있는 교육기득권을 포기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교육개혁의 목소리를 내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 마음 안의 그 기득권 때문에, 드라마 속의 죽음처럼 내 아이의 삶이 송두리째 날아갈지도 모른다. 그 절박함으로 다시금 광장에서 같은 처지의 학부모와 시민들과 함께 만나야 한다. 드라마처럼 영상에 담기지 않아서 그렇지, 학교 안의 입시경쟁교육은 이미 그 과장된 드라마보다 훨씬 더 피폐하게 아이들의 영혼을 갉아먹고 있다. 아니, 이제는 그렇게 갉아먹는 것이 수십년째 지속되어도, 이미 생겨버린 내성 때문에 심각한 느낌조차 없을 정도로 심각하다. 학교폭력, 왕따 등은 그 심각함이 드러난 증상이다. 바꿔 말하면 본질적인 문제는 ‘입시경쟁교육’이라는 것이다. 그로 인해 꽃같은 우리 아이들이 그렇게 한해 두해 서서히 시들어가는 모습을 보는 마음은, 교사로서 그리고 학부모로서 매우 괴롭고 아프다.
왜냐면 |
[왜냐면] ‘스카이’(SKY)를 ‘캔슬’하는 유일한 방법 / 이광국 |
인천광역시 산곡고교 국어교사 최근 한 방송사의 <스카이(SKY) 캐슬> 드라마가 화제다. 이어 어떤 개그프로그램은 소위 명문대 이니셜로 된 이 ‘스카이’를 취소(해체)하겠다는 듯이 스카이 ‘캔슬’이라는 제목의 패러디극도 선보였다. 어쨌든 이 드라마는 입시경쟁교육이라는 숨막히는 소재로 정말 시청자들을 ‘숨막히게’ 만들고 있다. 그런데 시청자로서 이 드라마를 흥미진진하게 ‘소비’한다고 해서, 한편으로 대상화하여 경멸해 마지않던 그 ‘캐슬’이 우리 현실 속에서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절망감이 앞서는 건 왜일까. 만약 왜곡된 대한민국 교육이 바로잡혔으면 좋겠다는 것이 작가의 의도라면, 이를 위해 드라마 시청 이후 작가의 의도를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은 과연 없을까. 국어교사로서 혼신의 힘을 다해 아이들에게 국어와 문학을 17년간 가르쳐왔지만, 지나고 보니 입시경쟁의 손바닥 안에서 허우적대고 말았다는 자괴감은 결코 필자만의 것은 아닐 것이다. 잘못된 교육임이 분명한데 한편으로 ‘스카이 캐슬식 수업’이라며 홍보하는 학원도 있는 것이 현실이다. 공부를 잘했거나 못했거나 간에, 아이들이 자신의 적성에 맞는 직업(이 무엇이든)을 찾아 안전하고 행복하게 일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기성세대가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해주어야 하는 일이 아닐까. 그럼에도 열악하다 못해 죽음에 내몰리는 노동환경, 저임금에 시달리는 비정규직 등 취업난과 더불어 내몰리는 청년들의 신산한 삶은 변화가 없다. 이런 현실이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절망감 속에서 내 자식만은 고생시키지 않겠다는 부모로서의 선한(?) 마음이 왜곡된 경쟁교육을 부풀려왔다는 점에서 입시경쟁교육의 해소를 더욱 어렵게 한다. 이제는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정치인이나 대학 관계자 등에 대한 기대감도 저물어간다.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결국, ‘스카이’의 교육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그들로서는 그것을 해체할 그 어떤 의지도 갖고 있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답은 하나다. 2년 전 온전히 시민들이 들고 일어난 그 촛불혁명이 낡은 정치를 몰아냈듯, 이제는 촛불 ‘교육’혁명이 아니면 바뀌기 어려울 것 같다. 입시경쟁교육의 원인인 이른바 학벌사회의 타파를 위한 다양한 논의들이 그동안 없었던 것도 아니다. 서울대 폐지와 같은 고질적 학벌체계에 대한 해체 논의는 ‘국공립대 네트워크 구축’이나 프랑스나 독일 등이 시행하는 ‘대학평준화’ 등의 정책으로 담론화되어 있음에도 실천의 진척이 없을 따름이다. 이제 드라마 <스카이 캐슬>이 종영되고 나면, 우리가 나서야 한다. 더 이상 이런 비정상적인 교육이 계속될 수는 없다는 시민들의 목소리가 들불처럼 일어나야 한다. 어쩌면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기성세대 스스로 나름대로 가지고 있는 교육기득권을 포기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교육개혁의 목소리를 내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 마음 안의 그 기득권 때문에, 드라마 속의 죽음처럼 내 아이의 삶이 송두리째 날아갈지도 모른다. 그 절박함으로 다시금 광장에서 같은 처지의 학부모와 시민들과 함께 만나야 한다. 드라마처럼 영상에 담기지 않아서 그렇지, 학교 안의 입시경쟁교육은 이미 그 과장된 드라마보다 훨씬 더 피폐하게 아이들의 영혼을 갉아먹고 있다. 아니, 이제는 그렇게 갉아먹는 것이 수십년째 지속되어도, 이미 생겨버린 내성 때문에 심각한 느낌조차 없을 정도로 심각하다. 학교폭력, 왕따 등은 그 심각함이 드러난 증상이다. 바꿔 말하면 본질적인 문제는 ‘입시경쟁교육’이라는 것이다. 그로 인해 꽃같은 우리 아이들이 그렇게 한해 두해 서서히 시들어가는 모습을 보는 마음은, 교사로서 그리고 학부모로서 매우 괴롭고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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