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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1.09 18:06 수정 : 2019.01.09 19:27

이승홍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비극적인 사건으로 유명을 달리한 임세원 교수를 위한 애도의 물결이 각계에서 이어지고 있다. 이런 일이 두번 다시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는 모두가 한마음일 것이다. 고인을 잃은 유가족은 비통함을 뒤로하고 ‘안전한 진료환경을 만드는 것’과 더불어 ‘이번 사건이 정신과 환자들에 대한 또 다른 차별로 이어지지 않아야 한다’고 호소했다. 이러한 유가족의 모습에 최근 주요 일간지 지면에는 ‘유가족의 품격’이라는 표현까지 등장했다. 물론 품격이란 좋은 것이지만 이러한 한가로운 품평은 한편으로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임세원 교수의 유가족이 고작 품격을 칭송받길 원해 극도로 절제된 입장을 내놓았던 것은 아닐 것이다. 유가족이 환자들에 대한 차별과 편견을 걱정한 이유는 오히려 우리 사회에 정신질환에 대한 편견이 얼마나 만연해 있는지를 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언론에 비친 유가족의 모습이 일견 차분해 보일지 몰라도 여론이 더 이상 문제의 본질을 비켜가서는 안 된다는 피 맺힌 절규로 느껴지는 이유다.

정신과 환자에 의한 폭력 사건이 발생했을 때 그동안 언론이 보인 행태는 충분히 우려스럽다. 선정적인 제목과 단편적인 분석으로 국민들에게 전달되는 것은 오직 정신질환이 잠재적으로 범죄로 이어질 수 있다는 불안감뿐이었다. 소위 ‘강남역 사건’이라 불리는 살해 사건의 경우는 어떠한가. ‘여성혐오 범죄’라는 의혹을 잠재우기 위해 정신과 환자에 의한 ‘묻지마 범죄’라는 수사를 적극 활용하지 않았던가. 이런 보도들이 쏟아질 때마다 정신의학계는 정신과 환자들의 범죄율이 일반 인구에 비해 오히려 낮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애써야 한다. 하지만 이내 또 다른 사건이 조명되고 편견은 강화된다.

정신질환에 의하여 합리적인 맥락 없이 벌어지는 사건들은 물론 충격적이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사회가 국민들의 정신건강을 돌보기 위해 제도적 정비를 충분히 하고 있는지, 환자들의 치료를 돕기 위해 노력할 부분은 없는지 되짚지 않았다. 정신질환에 의해 사건이 일어난다는 것은 거꾸로 말해 치료만 제대로 이루어졌어도 억울한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의미임을 우리는 상기해야 한다.

임세원 교수를 해치고 현장에서 구속된 피의자가 증상이 그렇게까지 악화되기 전에 병원에 갈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칼을 든 가해자와 목숨을 잃은 피해자가 아니라 병원을 방문한 환자와 성실한 의사로 손잡을 수 있지 않았을까. 그가 병원에 가지 않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치료를 중단했다는 1년 동안 그는 어떤 삶을 살았던 것일까. 가족들은 어째서 그와의 왕래를 단절할 수밖에 없었을까. 이러한 의문에 피의자가 직접 대답할 수 없다 해도 우리는 스스로 되물어야 한다.

“매일 약을 먹을 때마다 내가 정신과 환자라는 사실이 상기되어서 병원에 안 왔어요.” 아직은 이르다는 간곡한 설득에도 기어코 치료를 중단하고 지내다가 질환이 재발한 환자들에게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설명이다. 환자들이 정신질환에 대한 사회적 시선을 얼마나 두렵게 느끼는지 의사들도 모르지 않는다. 그 마음에 공감하며 환자에게 다가가려 노력하지만 사회에 차별과 편견이 만연해 있다면 치료관계를 맺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 환자들이 치료에서 멀어지고 사회에서 고립되면 그중 일부에서 사회에 충격을 주는 사건·사고가 발생하게 되고 그것이 오히려 사회적 낙인을 심화하는 악순환이 이어진다.

정신과 질환은 본인 스스로 질병을 인식하기 어렵고 스스로를 돌볼 판단 능력을 흐리게 한다는 특징이 있다. 증상이 악화될 때 주변 사람들에게 불안감을 줄 수 있으며 증상 때문에 가족과의 관계가 깨지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소위 발전된 국가들은 정신과적 치료를 개인과 가족에게만 책임을 지우지 않는다. 사회가 책임을 나누고 가족과 환자들을 지원하기 위한 지역 정신보건체계가 유기적으로 가동되도록 노력한다. 충분한 인력과 전문가 그룹을 양성해 환자들이 삶을 재건할 수 있도록 입체적인 도움을 주는 정신보건체계와 사회복지 시스템은 정신질환을 경험하는 개인을 차별 없는 사회의 구성원으로 통합시켜준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대부분 회원국들은 이런 변화를 1960~70년대에 이룩해낸 결과, 정신질환에 대한 사회적 편견 역시 줄어드는 것을 확인하고 있다. 지금 ‘품격’이 필요한 곳은 다름 아닌 정신질환을 대하는 우리 사회의 자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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