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8.12.26 18:48
수정 : 2018.12.26 19:21
손익찬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부설 ‘당장멈춰’ 상황실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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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준식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위원장이 26일 오전 고 김용균 시민대책위 주최로 국회 앞에서 열린 산업안전보건법(산안법) 전부개정안 통과를 촉구하는 시민 필리버스터에서 ‘외험의 외주화’를 막을 산안법 통과를 주장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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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은 발전소 컨베이어벨트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면 좁고 어두운 공간에 머리를 집어넣어 소리를 자세히 듣고 상황을 보고하는 일을 했다. 컨베이어는 초속 5m로 움직이고 있었다. 컨베이어벨트와 노동자 사이에는 아무런 보호막이 없었다. 일순간에 사고는 발생했고 그의 머리와 몸은 분리되어 사망했다.
산업안전보건법은 김용균에게 ‘작업중지권’을 보장한다고 말한다. 노동자가 ‘산업재해가 발생할 급박한 위험이 있다고 믿을 만한 합리적인 근거가 있는 경우’에는 작업을 중지하고 대피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처음 들어보는가. 정말로 이런 권리가 있다. 감정노동자가 고객의 전화를 끊을 권리도 작업중지권의 한 종류다. 그런데도 왜 ‘김용균들’은 작업중지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는가.
이유는 두가지다. 첫째는 작업중지권이 죽어버린 권리이기 때문이다. 노동자가 작업중지권을 행사하는 순간 업무방해죄 기소, 민사상 손해배상 청구와 가압류, 징계 책임을 피해갈 수가 없다. 노동자들이 협박당하는 것이다. 너가 죽어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로 일을 멈춰서는 안 된다는 협박이다. 이런 상황에서 감히 작업중지권을 행사할 노동자는 없다.
두번째 이유는 정부는 사업주에게 ‘작업중지명령’을 내릴 수 있는데 이 명령조차도 사고 발생 이후에만 발령되고 있기 때문이다. 산재 위험이 있으면 1588-3088(위험상황 신고전화)을 통해 노동청에 신고할 수 있다. 그러나 노동청은 ‘근로감독관이 부족해서 현장에 나가볼 수가 없다’든지 ‘사업주와 잘 이야기하라’는 답변을 자주 한다. 정부의 작업중지명령조차도 예방적으로 내려지는 경우는 없다. 사망사고가 발생한 이후에야 재발 방지 목적으로 명령이 내려지고 있다.
한마디로 노동자들은 무방비, 무정부 상태로 산재에 노출되어 있다. 작업중지권이 살아 있는 권리였다면 김용균은 이 위험한 작업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고속으로 돌아가는 컨베이어와 작업공간 사이에 보호 울타리 설치를 요구하거나, 컨베이어 긴급 정지 버튼을 눌러줄 인원의 충원을 요구하거나, 애당초 컨베이어벨트를 멈추고 점검을 해야 한다고 요구했을 것이다. 김용균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부설 ‘당장멈춰’ 상황실은 전국 각지의 산재 발생 직전이나 직후의 상황을 제보받고 있다. 정말로 긴박한 상황에도 노동자는 형사, 민사, 징계책임이 두려워 작업중지권 행사를 망설인다. 위험상황 신고전화를 통해 정부에 작업중지명령을 요구하더라도 일선의 늑장대응, 무성의한 대응 때문에 현장 노동자들은 분통을 터뜨리는 일이 다반사다. 매일 5명씩 산재로 죽는다. 어딘가에서는 누군가의 자식이, 누군가의 엄마 아빠가 매일 죽고 있다는 말이다.
현재 국회에서는 위험작업의 도급을 제한하는 ‘김용균법’이 논의 중이다. 고인의 부모님과 노동계의 바람대로 이 법은 조속히 통과되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김용균법’이 통과되더라도 작업중지권은 크게 개선되는 부분이 없다. 다른 한편, 현행법상 작업중지권을 정한 내용이 노동자에게 크게 불리한 내용도 아니다. 작업중지권을 살아 움직이는 권리로 작동시키기 위한 정부와 각 주체의 의지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문재인 정부와 노동계, 시민사회는 작업중지권을 살아 움직이는 권리로 만들기 위한 고민을 이제라도 시작해야 한다. 그것이 고인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고 ‘김용균들’을 살려내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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