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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10.31 19:26 수정 : 2018.10.31 20:11

이해성 블랙리스트 타파 및 공공성 회복을 위한 연극인회의 상임대표

2년 전 11월4일. 문화예술단체 300여곳과 예술인들 7500여명이 ‘우리가 모두 블랙리스트’라는 공동선언과 함께 광화문광장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날부터 텐트를 치고 점거농성에 들어갔다. ‘박근혜 퇴진과 시민정부 구성을 위한 예술인행동위원회’가 꾸려지고 광화문 캠핑촌이 시작된 것이다. 결국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되었고 블랙리스트를 주도했던 김기춘 전 비서실장과 두 명의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구속되었다.

1년 전 11월4일. 문화예술인들이 다시 광화문에 모여 이명박과 유인촌을 고발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명박 정부 때도 청와대와 국정원, 문체부 등을 중심으로 블랙리스트가 치밀하게 작동했다는 정황이 속속 드러났다. 이명박 전 대통령도 비록 다른 죄지만 구속되었다. 영포빌딩 지하에서 발견된 3000여건의 문서에는 블랙리스트 관련 문서도 있다는 언론 보도가 있었다. 이후 규명되어야 할 진실이다.

그리고 2018년 11월3일. 문화예술인들이 다시 문체부 등의 뒤에 숨어 적폐청산을 외면·방치·방해하는 국회 앞에서 모여 공동선언과 면담을 진행하고, 적폐청산을 국정과제 1호로 삼았던 청와대까지 행진한다. 2년 전 블랙리스트 사태를 물고 늘어져 국감에서 스타가 되었던 현 문체부 장관께서는 왜 예술인들이 이제 국회와 청와대까지 찾아야 하는지 알고 계실까. 블랙리스트는 문화예술인들의 존재 이유를 지워버리고 국민들의 문화예술 향유 권리를 억압하고 사상과 양심, 표현 등 민주주의의 가치를 훼손한 반헌법적 국가범죄다. 이 사건이 스모킹 건이 되어 전 정권이 붕괴되었다고 해도 될 만큼 엄중하고 상징적인 반민주적 만행이었다. 이를 바로잡자고 2017년 8월 정부와 문체부의 철저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이라는 약속을 믿고 민간 합동으로 진상조사위를 만들었고, 11개월의 시간 동안 부족한 권한과 인력, 예산과 다양한 방해에도 불구하고 방대한 진상조사 결과보고서와 징계권고안을 발표했었다.

그런데 문체부는 이 모든 과정과 결과를 무시하고 ‘징계 0명’이라는 독자적인 면죄 이행계획안을 발표했다. 문체부 장관이 공동위원장으로 있던 진상조사위원회의 최소 결과마저 무력화해버린 게 발단이다. 예술인들은 자신들이 배제되었기 때문에 화가 나서 긴 시간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니다. 좀 더 아름답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간절함 때문이다. 그러나 의지 없는 정부와 장관, 관료주의 때문에 블랙리스트 진상규명을 비롯해 모든 문화 분야의 적폐가 제대로 청산되지 못하고 있다. 책임규명 대상인 소수 불법 관료들을 지키기 위해 오히려 다수인 선량한 공직자마저 범죄집단으로 몰리고 있는 게 옳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진짜 하급공무원들이 함께하고 있는 전국공무원노조는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절 법외노조가 되면서 탄압받고 사소한 이유로도 쫓겨나 현재도 해직된 120여명이 공직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그해 겨울은 유독 추웠다. 어느 겨울날, 광화문 캠핑촌 연극인텐트에서 자고 있는데 뭔가 얼굴을 눌러 눈을 뜨니 텐트 천장이 얼굴을 누르고 있었다. 밀쳐내고 밖으로 나가니 폭설에 텐트들이 내려앉아 있었다. 황급히 일어나 촌민들과 함께 텐트를 바로 세우고 블랙텐트에 쌓여 있던 눈을 털어내고 광장에 쌓여 있던 눈을 치우기 시작했다. 우리에겐 전기도, 물도, 화장실도 허락되지 않았다. 노숙을 하며 가장 신세를 많이 진 곳을 꼽으라고 한다면 캠핑촌 촌민들 대부분이 인근의 커피전문점을 꼽을 것이다. 지하철이 끊기고 나면 지하철 화장실도 사용할 수 없어 길 건너에 있는 24시간 운영 점포의 화장실을 사용했다. 혹독한 추위에 잠이 오지 않을 때면 한번씩 이곳으로 넘어가 몸을 녹이고 들어오기도 했다. 그 추운 겨울 새벽, 다시 텐트로 돌아갈 때 눈이 쌓여 하얗게 변해버린 광장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모든 특권과 성역과 불의를 단죄하고 조금은 더 깨끗해지는 세상이었다. 그 꿈이 다시 짓밟히는 것을 볼 수 없어 11월3일 동료 문화예술인들, 촛불시민들과 함께 대행진에 나선다. 성스럽지는 않더라도 그 새벽의 눈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당당한 시대의 발자국을 다시 남겨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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