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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10.01 17:45 수정 : 2018.10.01 19:34

노청한
사회복지사

추석을 앞두고 고향에 있는 조상 산소에 다녀왔다. 모처럼 흩어져 사는 형제자매가 모여 벌초와 성묘를 했더니 마음이 무척 개운하다. 전처럼 시외버스를 탔으니 당연히 산소까지 걸어갔다. 그 길은 읍내의 중·고등학교까지 20리(8㎞)를 걸어 다니던 자갈길 신작로였다. 포장도로로 바뀐 지 오래지만 50여년 전의 통학길을 다시 걸으며 옛 추억에 잠겼다. 그땐 동네 앞산의 소릿길(소로, 지름길의 방언)을 오르고 내리고 하다가 신작로에 들어섰다. 그때부터 영어단어장을 꺼내 외우며 걷다 보면 1시간30분이 금방 지나 학교에 닿았다.

추억을 반추하기도 잠시, 자동차들이 우리 곁을 ‘스치듯’ 쌩쌩 달린다. 편도 1차로, 흙과 잡초에 묻혀 희미한 실선 밖이 사람이 걷는 길이겠지만 워낙 좁아 차로와 가로수 사이를 조심조심 걷는다. 길가 코스모스조차 밉게 보인다. 큰 차량이 도로 가장자리로 쏠리면 피할 데가 없는 셈이다. 그나마 평지라면 도로 밑으로 내려설 수도 있겠지만 낭떠러지가 있는 경사면이나 수로를 끼고 있다면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 나란히 걸어가는 것은 ‘무모한 일’에 가깝다. ‘일렬종대’가 그나마 안전하다. 늘어나는 차들과 변하지 않은 좁은 인도로 옛 통학길이 낯설기만 하다.

교통안전공단에 따르면 2013~2017년 보행 중 교통사고는 연평균 1.2%씩 감소했지만, 노인 보행 교통사고는 오히려 연간 4%씩 증가했다. 특히 보행 교통사고로 인한 사망자 가운데 노인이 차지하는 비율은 2013년 49.3%에서 지난해에는 56%까지 늘었다. 보행 중 교통사고로 숨지는 10명 중 6명이 노인이라는 의미다. 통계에서 일반국도와 지방도(시도, 군도) 등 도로 종별로 얼마나 많은 보행자가 교통사고를 당하는지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어느 해 경기도의 교통사고 중 국도와 지방도가 차지하는 비중은 87%에 이른다고 한다. 도로변 인근 시골 마을에 노인이 많음은 모두 아는 바다.

2002년 6월13일 전국이 월드컵 열기에 휩싸여 있을 때, 경기도 양주군 지방도에서 갓길을 걷던 여중생 두명이 미군 장갑차에 치여 숨진 가슴 아픈 사고가 발생했다. 이 사건은 나중에 미국과의 불평등한 관계 등을 상징하는 사회적 의제가 됐다. 또 하나의 중대한 문제는 사람이 걸어 다니기 힘든 지방도로의 구조였다. 무엇이 문제인가. 도로를 설계할 때는 도로의 기능, 교통량, 지형 등과 함께 도로 인근에 사는 주민 특성, 안전성, 환경 등을 고려해야 한다. 전체 도로가 자동차 전용도로는 아니지만, 자동차 중심으로 도로 종별이 분류돼 있다. 보행 수요 등 주변 환경에 따른 도로 기능은 무시됐다. 마을을 지나는 도로에도 같은 기준을 그대로 적용해 문제가 있는 것이다.

교통사고 처리에도 문제가 있다. 보·차도가 연석 등으로 구분된 도로에서 차량이 보도를 침범한 보행자 교통사고는 교통사고처리특례법상 사고 차량이 종합보험에 가입되어 있어도 치상사고이면 가해자는 형사 입건된다. 반면 연석으로 구분되어 있지 않은 실선 밖 보도나 갓길을 걸어가던 보행자의 교통사고는 도로교통법상 안전운전 불이행으로 처리돼 사고 차량이 종합보험에 가입되어 있거나 피해자가 처벌을 원치 않으면 ‘공소권 없음’으로 처리된다. 연석으로 구분된 인도가 없는 시골 도로를 걷던 피해자는 법적 보호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것이다.

제 역할을 하는 인도를 확보하자면 도로건설비 대부분을 차지하는 토지보상비용 문제 등 예산 타령이 나올 것이다. 하지만 정부는 시도(市道), 군도(郡道) 등 지방도로에도 연석으로 구분된 인도를 사고다발 구역부터 단계적으로 설치하자. 인도의 폭도 넓혀나가자. ‘사람은 당연히 차에 양보해야 한다’ ‘시골 사람들, 차 무서워할 줄 모른다’는 일부 운전자의 ‘의식 전환’도 함께 따라야 한다. 차와 도로가 ‘애물단지’가 아닌, 차와 도로, 사람이 공존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자. 시골길을 걷는 사람에게도 보행권이라는 것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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