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부·남양주시 화도읍 나는 낙태를 한 적이 있다. 20년도 더 된 일로, 주위 사람들의 눈을 피해 남자 친구와 숨듯이 들어간 병원에서 정말 많이도 울었다. 소문이 날까 무섭고, 왜 일을 이렇게 만들었을까 괴롭고, 남자 친구가 같이 있었지만 결국 나 혼자 이 두려운 수술을 해야 하는구나 싶어 지독하게 외로웠다. 그대로 딱 죽고 싶은 마음으로 수술대에 누워 마취제를 맞고 있을 때, 수술실에 들어오신 의사 선생님이 아무 말씀 없이 내 배를 부드럽게 한 번 문질렀다. 나를 위한 것인지 배 속의 생명을 위한 것인지 혹은 둘 다를 위한 것이었는지 모르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그때, 그 의사 선생님의 손길은 내게 평생 잊히지 않는 위로 혹은 기도 같은 것으로 가슴에 남아 있다. ‘낙태죄’라는 걸 알았을 때, 이후 헌법 소원에서 합헌 결정이 내려질 때,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내 잘못이든 아니든 내가 뜻밖의 임신을 했을 때, 겁에 질려 울고 있을 내 얼굴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배 속의 생명만 걱정하며 만약 이 생명을 죽이면 감옥에 처넣겠다고 온 세상이 나를 몰아세웠다면 그때 나는 어떻게 했을까? 아이를 낳아 키우고, 삶을 이만큼 사니 소문보다 더 무겁게 느껴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스무살의 나는 임신한 것이 남들 눈에 띄어 부모와 온 동네와 친구들에게 문란한 여자애로 소문이 나는 것을 감당하기보다 극단적인 방법을 택했을 것 같다. 불법시술소를 찾거나, 그것도 안 되면 그 어떤 독약이라도 마셨을지 모른다. 법무부는 편협하고 잘못된 성의식으로 낙태죄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더니, 보건복지부는 현실과 동떨어져 거의 사문화된 법 조항을 들먹이며 여자의 임신 중단을 도운 의사를 꼭 처벌하겠다고 나섰다가 반발이 심하자 철회했다. 그들이 말하는 ‘즐기고 나서’ 져야 하는 책임은 얼마나 가혹한지, 여자가 처한 상황을 안쓰럽게 여겨 돕는 손길조차 자르고 싶었나 보다. 스무살의 여자는 이제 아이를 십여년 키운 중년이 되었고, 지나온 시간 동안 생명의 존귀함과 생명을 키우는 책임의 막중함을 삶으로 느낀다. 아이는 저절로 자라는 것이 아니어서, 먹이고 입히고 씻기고 재우는 데 엄청난 수고와 돈과 끝없는 사랑과 관심이 들어간다. 주로 여자가 떠맡아온 이 모든 수고는, 스무살의 어린 여자도 막연하지만 알고 있었다. 자신이 그 무게를 버틸 수 있는 힘이 없다고 판단하고 임신을 중단했을 때, 도덕적 지탄이나 여자가 겪어야 할 몸과 마음의 고통으로는 모자란다고 법까지 만들어 단죄하는 일이 어떻게 생명을 고귀하게 여기는 일이 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생명을 갖고 낳고 키우는 엄마가 행복하지 않으면 아이가 행복하지 않고, 엄마의 짐을 아빠가, 사회가 나누어 지지 않으면 아이가 그 무게를 함께 감당하며 불행해진다는 것을 아이를 낳아 키우며 매 순간 느낀다. 여자와 남자가 사랑하고, 몸과 마음과 경제적·사회적 상황을 잘 살펴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삶으로 보여줄 때 아이도 몸과 마음이 건강하게 자란다. 피임 기술과 의학 지식이 발달했지만, 여전히 뜻밖의 임신은 인간의 삶에 있을 수밖에 없다. 생명의 고귀함은 그때 여자에게 무조건 낳아라, 그러지 않으면 벌하겠다고 협박하여 지켜지는 것이 아니다. 여자가 행복해야 아이가 행복하고, 꼭 그것이 아니더라도, 여자가 행복한 것만으로도 생명의 고귀함을 지키는 일이다. 그래서 ‘낙태는 죄악’이라는 말에 동의할 수 없다. 이 슬로건은 언뜻 생명을 대변하는 듯 들리나, 대단히 단순하고 거칠고 폭력적이다. 생명에 대한 진정한 성찰 없이, 정작 생명을 배 속에서 키우고 낳아서는 사랑으로 보살피는 여자를 태아의 생명과 반대되는 자리에 놓고, 무조건 낳아라 협박하는 무뢰배의 말이다. 누구보다 아이를 행복한 환경에서 키우고 싶어 하는 최우선에 있는 여자에게 네 상황, 네 생각, 네 결정 따윈 필요 없다고 냅다 걷어차는 말이다. 어쩔 수 없는 이유로 임신 중단을 결정한 여자를 몰아붙이며, 안전하고 위생적인 의료의 도움을 받지 못하도록 절벽 아래로 무자비하게 떠미는 말이다. 수술로 몸과 마음에 상처를 받고 그 후유증을 혼자 짊어져야 하는 여자를 즐기기만 하고 무책임하다고 비난하며 범죄자로 만드는 무서운 말이다. 여자에게 생명을 낳고 키우는 모든 책임을 지우는 사회일수록 여성을 옭아매고 단죄하려고 든다. 즐기는 것이 무엇이 잘못인가. 다른 일은 몰라도 아이를 키우는 일은 ‘즐기지는 않고 책임만 지는 것’이 더 잘못일 수 있다. 아이를 갖고, 낳고, 키우는 즐거움 같은 것은 느끼지 말고, 책임만 지라는 낙태죄에 동의할 수 없다. 모두가 즐길 수 있도록 여성 말고, 생명의 존귀함을 말로만 주장하는 이 몰상식한 법에 돌을 던져라. 그리고 뜻밖의 임신으로 두려워하고 절망하고 있을 여자들에게, 내가 스무살에 만났던 그 산부인과 의사 선생님을 돌려 달라.
왜냐면 |
[왜냐면] 스무살에 만난 그 산부인과 의사를 돌려 달라 / 루나 |
루나
주부·남양주시 화도읍 나는 낙태를 한 적이 있다. 20년도 더 된 일로, 주위 사람들의 눈을 피해 남자 친구와 숨듯이 들어간 병원에서 정말 많이도 울었다. 소문이 날까 무섭고, 왜 일을 이렇게 만들었을까 괴롭고, 남자 친구가 같이 있었지만 결국 나 혼자 이 두려운 수술을 해야 하는구나 싶어 지독하게 외로웠다. 그대로 딱 죽고 싶은 마음으로 수술대에 누워 마취제를 맞고 있을 때, 수술실에 들어오신 의사 선생님이 아무 말씀 없이 내 배를 부드럽게 한 번 문질렀다. 나를 위한 것인지 배 속의 생명을 위한 것인지 혹은 둘 다를 위한 것이었는지 모르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그때, 그 의사 선생님의 손길은 내게 평생 잊히지 않는 위로 혹은 기도 같은 것으로 가슴에 남아 있다. ‘낙태죄’라는 걸 알았을 때, 이후 헌법 소원에서 합헌 결정이 내려질 때,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내 잘못이든 아니든 내가 뜻밖의 임신을 했을 때, 겁에 질려 울고 있을 내 얼굴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배 속의 생명만 걱정하며 만약 이 생명을 죽이면 감옥에 처넣겠다고 온 세상이 나를 몰아세웠다면 그때 나는 어떻게 했을까? 아이를 낳아 키우고, 삶을 이만큼 사니 소문보다 더 무겁게 느껴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스무살의 나는 임신한 것이 남들 눈에 띄어 부모와 온 동네와 친구들에게 문란한 여자애로 소문이 나는 것을 감당하기보다 극단적인 방법을 택했을 것 같다. 불법시술소를 찾거나, 그것도 안 되면 그 어떤 독약이라도 마셨을지 모른다. 법무부는 편협하고 잘못된 성의식으로 낙태죄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더니, 보건복지부는 현실과 동떨어져 거의 사문화된 법 조항을 들먹이며 여자의 임신 중단을 도운 의사를 꼭 처벌하겠다고 나섰다가 반발이 심하자 철회했다. 그들이 말하는 ‘즐기고 나서’ 져야 하는 책임은 얼마나 가혹한지, 여자가 처한 상황을 안쓰럽게 여겨 돕는 손길조차 자르고 싶었나 보다. 스무살의 여자는 이제 아이를 십여년 키운 중년이 되었고, 지나온 시간 동안 생명의 존귀함과 생명을 키우는 책임의 막중함을 삶으로 느낀다. 아이는 저절로 자라는 것이 아니어서, 먹이고 입히고 씻기고 재우는 데 엄청난 수고와 돈과 끝없는 사랑과 관심이 들어간다. 주로 여자가 떠맡아온 이 모든 수고는, 스무살의 어린 여자도 막연하지만 알고 있었다. 자신이 그 무게를 버틸 수 있는 힘이 없다고 판단하고 임신을 중단했을 때, 도덕적 지탄이나 여자가 겪어야 할 몸과 마음의 고통으로는 모자란다고 법까지 만들어 단죄하는 일이 어떻게 생명을 고귀하게 여기는 일이 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생명을 갖고 낳고 키우는 엄마가 행복하지 않으면 아이가 행복하지 않고, 엄마의 짐을 아빠가, 사회가 나누어 지지 않으면 아이가 그 무게를 함께 감당하며 불행해진다는 것을 아이를 낳아 키우며 매 순간 느낀다. 여자와 남자가 사랑하고, 몸과 마음과 경제적·사회적 상황을 잘 살펴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삶으로 보여줄 때 아이도 몸과 마음이 건강하게 자란다. 피임 기술과 의학 지식이 발달했지만, 여전히 뜻밖의 임신은 인간의 삶에 있을 수밖에 없다. 생명의 고귀함은 그때 여자에게 무조건 낳아라, 그러지 않으면 벌하겠다고 협박하여 지켜지는 것이 아니다. 여자가 행복해야 아이가 행복하고, 꼭 그것이 아니더라도, 여자가 행복한 것만으로도 생명의 고귀함을 지키는 일이다. 그래서 ‘낙태는 죄악’이라는 말에 동의할 수 없다. 이 슬로건은 언뜻 생명을 대변하는 듯 들리나, 대단히 단순하고 거칠고 폭력적이다. 생명에 대한 진정한 성찰 없이, 정작 생명을 배 속에서 키우고 낳아서는 사랑으로 보살피는 여자를 태아의 생명과 반대되는 자리에 놓고, 무조건 낳아라 협박하는 무뢰배의 말이다. 누구보다 아이를 행복한 환경에서 키우고 싶어 하는 최우선에 있는 여자에게 네 상황, 네 생각, 네 결정 따윈 필요 없다고 냅다 걷어차는 말이다. 어쩔 수 없는 이유로 임신 중단을 결정한 여자를 몰아붙이며, 안전하고 위생적인 의료의 도움을 받지 못하도록 절벽 아래로 무자비하게 떠미는 말이다. 수술로 몸과 마음에 상처를 받고 그 후유증을 혼자 짊어져야 하는 여자를 즐기기만 하고 무책임하다고 비난하며 범죄자로 만드는 무서운 말이다. 여자에게 생명을 낳고 키우는 모든 책임을 지우는 사회일수록 여성을 옭아매고 단죄하려고 든다. 즐기는 것이 무엇이 잘못인가. 다른 일은 몰라도 아이를 키우는 일은 ‘즐기지는 않고 책임만 지는 것’이 더 잘못일 수 있다. 아이를 갖고, 낳고, 키우는 즐거움 같은 것은 느끼지 말고, 책임만 지라는 낙태죄에 동의할 수 없다. 모두가 즐길 수 있도록 여성 말고, 생명의 존귀함을 말로만 주장하는 이 몰상식한 법에 돌을 던져라. 그리고 뜻밖의 임신으로 두려워하고 절망하고 있을 여자들에게, 내가 스무살에 만났던 그 산부인과 의사 선생님을 돌려 달라.
주부·남양주시 화도읍 나는 낙태를 한 적이 있다. 20년도 더 된 일로, 주위 사람들의 눈을 피해 남자 친구와 숨듯이 들어간 병원에서 정말 많이도 울었다. 소문이 날까 무섭고, 왜 일을 이렇게 만들었을까 괴롭고, 남자 친구가 같이 있었지만 결국 나 혼자 이 두려운 수술을 해야 하는구나 싶어 지독하게 외로웠다. 그대로 딱 죽고 싶은 마음으로 수술대에 누워 마취제를 맞고 있을 때, 수술실에 들어오신 의사 선생님이 아무 말씀 없이 내 배를 부드럽게 한 번 문질렀다. 나를 위한 것인지 배 속의 생명을 위한 것인지 혹은 둘 다를 위한 것이었는지 모르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그때, 그 의사 선생님의 손길은 내게 평생 잊히지 않는 위로 혹은 기도 같은 것으로 가슴에 남아 있다. ‘낙태죄’라는 걸 알았을 때, 이후 헌법 소원에서 합헌 결정이 내려질 때,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내 잘못이든 아니든 내가 뜻밖의 임신을 했을 때, 겁에 질려 울고 있을 내 얼굴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배 속의 생명만 걱정하며 만약 이 생명을 죽이면 감옥에 처넣겠다고 온 세상이 나를 몰아세웠다면 그때 나는 어떻게 했을까? 아이를 낳아 키우고, 삶을 이만큼 사니 소문보다 더 무겁게 느껴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스무살의 나는 임신한 것이 남들 눈에 띄어 부모와 온 동네와 친구들에게 문란한 여자애로 소문이 나는 것을 감당하기보다 극단적인 방법을 택했을 것 같다. 불법시술소를 찾거나, 그것도 안 되면 그 어떤 독약이라도 마셨을지 모른다. 법무부는 편협하고 잘못된 성의식으로 낙태죄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더니, 보건복지부는 현실과 동떨어져 거의 사문화된 법 조항을 들먹이며 여자의 임신 중단을 도운 의사를 꼭 처벌하겠다고 나섰다가 반발이 심하자 철회했다. 그들이 말하는 ‘즐기고 나서’ 져야 하는 책임은 얼마나 가혹한지, 여자가 처한 상황을 안쓰럽게 여겨 돕는 손길조차 자르고 싶었나 보다. 스무살의 여자는 이제 아이를 십여년 키운 중년이 되었고, 지나온 시간 동안 생명의 존귀함과 생명을 키우는 책임의 막중함을 삶으로 느낀다. 아이는 저절로 자라는 것이 아니어서, 먹이고 입히고 씻기고 재우는 데 엄청난 수고와 돈과 끝없는 사랑과 관심이 들어간다. 주로 여자가 떠맡아온 이 모든 수고는, 스무살의 어린 여자도 막연하지만 알고 있었다. 자신이 그 무게를 버틸 수 있는 힘이 없다고 판단하고 임신을 중단했을 때, 도덕적 지탄이나 여자가 겪어야 할 몸과 마음의 고통으로는 모자란다고 법까지 만들어 단죄하는 일이 어떻게 생명을 고귀하게 여기는 일이 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생명을 갖고 낳고 키우는 엄마가 행복하지 않으면 아이가 행복하지 않고, 엄마의 짐을 아빠가, 사회가 나누어 지지 않으면 아이가 그 무게를 함께 감당하며 불행해진다는 것을 아이를 낳아 키우며 매 순간 느낀다. 여자와 남자가 사랑하고, 몸과 마음과 경제적·사회적 상황을 잘 살펴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삶으로 보여줄 때 아이도 몸과 마음이 건강하게 자란다. 피임 기술과 의학 지식이 발달했지만, 여전히 뜻밖의 임신은 인간의 삶에 있을 수밖에 없다. 생명의 고귀함은 그때 여자에게 무조건 낳아라, 그러지 않으면 벌하겠다고 협박하여 지켜지는 것이 아니다. 여자가 행복해야 아이가 행복하고, 꼭 그것이 아니더라도, 여자가 행복한 것만으로도 생명의 고귀함을 지키는 일이다. 그래서 ‘낙태는 죄악’이라는 말에 동의할 수 없다. 이 슬로건은 언뜻 생명을 대변하는 듯 들리나, 대단히 단순하고 거칠고 폭력적이다. 생명에 대한 진정한 성찰 없이, 정작 생명을 배 속에서 키우고 낳아서는 사랑으로 보살피는 여자를 태아의 생명과 반대되는 자리에 놓고, 무조건 낳아라 협박하는 무뢰배의 말이다. 누구보다 아이를 행복한 환경에서 키우고 싶어 하는 최우선에 있는 여자에게 네 상황, 네 생각, 네 결정 따윈 필요 없다고 냅다 걷어차는 말이다. 어쩔 수 없는 이유로 임신 중단을 결정한 여자를 몰아붙이며, 안전하고 위생적인 의료의 도움을 받지 못하도록 절벽 아래로 무자비하게 떠미는 말이다. 수술로 몸과 마음에 상처를 받고 그 후유증을 혼자 짊어져야 하는 여자를 즐기기만 하고 무책임하다고 비난하며 범죄자로 만드는 무서운 말이다. 여자에게 생명을 낳고 키우는 모든 책임을 지우는 사회일수록 여성을 옭아매고 단죄하려고 든다. 즐기는 것이 무엇이 잘못인가. 다른 일은 몰라도 아이를 키우는 일은 ‘즐기지는 않고 책임만 지는 것’이 더 잘못일 수 있다. 아이를 갖고, 낳고, 키우는 즐거움 같은 것은 느끼지 말고, 책임만 지라는 낙태죄에 동의할 수 없다. 모두가 즐길 수 있도록 여성 말고, 생명의 존귀함을 말로만 주장하는 이 몰상식한 법에 돌을 던져라. 그리고 뜻밖의 임신으로 두려워하고 절망하고 있을 여자들에게, 내가 스무살에 만났던 그 산부인과 의사 선생님을 돌려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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