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수 윤한봉 기념사업회 상임이사· 전 민주노동당 정치연수원장 마지막 어머님을 뵙고 나오는 당신의 발걸음은 얼마나 무거웠나요? 우리는 30년 전 분신을 반대했습니다. 죽는 것보다 더 끈질긴 강인함으로 살아 끝까지 운동해야 한다고 주장한 우리였습니다. 그 시절 노동 현장에서 캠퍼스에서 발생하는 동료들의 분신과 투신을 막아야 한다고, 어떤 욕을 먹더라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던 당신이었잖아요? 그랬습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순박했습니다. 약자를 돕고, 강자와 맞서는 것이 정의로운 삶이라고 배우며 자랐습니다. 민주주의를 짓밟는 독재자를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광주일고에서, 당신은 경기고에서 박정희 유신체제를 반대하였습니다. 우리는 일신의 출세와 부귀를 우습게 보았습니다. 인생을 부와 권력에 맡기기엔, 우리의 청춘이 너무 고귀하였고, 젊음을 독재자의 하수인으로 살기엔 우리의 자존감이 너무 높았습니다. 헌신짝처럼 대학을 버리고 공장으로 갔습니다. 우리는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을 위한 길고 긴 장정에 나섰으나, 당면한 시대의 문제를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박종철군이 공권력에 의해 숨지자 우리는 신속하게 행동에 나섰습니다. ‘살인 고문 강간 정권을 타도하자’는 격문을 뿌렸고, 부천역 앞에서 군중 시위를 주도하였습니다. 다시 서울의 명동으로 달려가 군중 시위를 주도하였습니다. 1987년 6월 인천에서 전개된 군중 시위의 대부분은 우리의 손에서 결정되었고, 집행되었습니다. 우리는 대중과 함께하는 실천을 바탕으로, 마침내 ‘인천지역 민주노동자연맹’의 창립을 선포했습니다. 우리의 판단은 늘 정확했습니다. 1987년 가을 대통령선거에서 김영삼씨와 김대중씨가 경합하는 것은 민주진영의 공멸이라 보았고, 민주연립정부 수립을 목표로 민중후보를 추대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1987년과 1988년 두 여름은 뜨거웠습니다. 노동자의 대파업이 한반도를 휩쓸었습니다. 이 시기 당신은 민주노총의 건설을 노동운동의 조직적 목표로 제시했습니다. 정확한 판단이었습니다. 우리는 공리공론에 휩쓸리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우리는 낡은 이론에 얽매이는 것에도 반대했습니다. 우리는 소수의 혁명가가 운영하는 비합법적 정당이 시대에 뒤떨어진 것임을 확인하면서 더 이상 집착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진보적 대중정당이라는 더 힘든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우리는 논쟁은 하되 다투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는 나이를 따지지 않았고, 논쟁의 결과에 관계없이 상대의 의견을 존중할 줄 알았습니다. 늘 소수 의견이었던 나의 주장을 실천적으로 수용한 것은 당신이었습니다. 우리의 이야기는 모두 철학이었고, 해학이었습니다. 우리는 일신에 다가오는 위험 때문에 가야 할 길을 비켜 가지 않았습니다. 1989년 가을이었습니다. 우리는 <사회주의자>를 발간하였죠. 그것은 모두의 꿈이었던 ‘노동자 정당 건설’을 향한 대담한 도전이었습니다. 당시 잡히면 넥타이 공장에 갈(사형선고의 은어), 가장 위험한 길을 선택했음에도 우리는 마음이 편했습니다. <사회주의자>를 발간하고 우리는 신림동의 어느 주점에 들렀지요.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았는지 모르겠습니다. 밤이 이슥한 것도 잊으며 마셨는데 청하 두상자를 비웠더랬지요. 어머님의 손을 잡고 투옥된 삼촌께 면회 가던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들은 것은 그 무렵이었습니다. 1989년 12월 당신은 치안본부에 체포되었고, 국가보안법 위반이라는 죄명으로 옥고를 치렀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선택에 대해 늘 비판적인 사유를 하였습니다. 1993년, 3년간의 옥고를 치르고, 당신은 광주를 방문했습니다. 그때 나는 가장 혹독한 생활고에 시달렸고, 미친 듯, 무등산을 헤매고 다녔습니다. 길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나는 당신을 만나, ‘우리가 걸어온 길에 한가지의 오류가 있었던 것 같다. 그게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당신은 ‘우리의 선택 중에 잘못은 없다’고 말했죠. 이후 당신은 진보정당을 만드는 일의 선봉 역을 담당하였고, 모든 역경과 고난을 다 이겨왔습니다. 그 어떤 곤란에도 흔들리지 않았던 당신이었습니다. 그런 당신이 여기에서 삶을 그만두다니요? 덫에 걸린 당신, 몸부림쳤을 당신의 최후가 나의 영혼을 찢습니다. 모두가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을 만들자고 뛰어든 진보정당 운동이었는데, 이렇게도 진보정당의 가는 길이 힘들다니 너무나 억울하고 분통합니다. 선장을 잃은 진보정당의 조각배는 이제 무엇에 의지하여 망망대해를 헤쳐나가야 하나요?
왜냐면 |
[왜냐면] 나는 노회찬을 보낼 수 없다 / 황광우 |
황광우
합수 윤한봉 기념사업회 상임이사· 전 민주노동당 정치연수원장 마지막 어머님을 뵙고 나오는 당신의 발걸음은 얼마나 무거웠나요? 우리는 30년 전 분신을 반대했습니다. 죽는 것보다 더 끈질긴 강인함으로 살아 끝까지 운동해야 한다고 주장한 우리였습니다. 그 시절 노동 현장에서 캠퍼스에서 발생하는 동료들의 분신과 투신을 막아야 한다고, 어떤 욕을 먹더라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던 당신이었잖아요? 그랬습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순박했습니다. 약자를 돕고, 강자와 맞서는 것이 정의로운 삶이라고 배우며 자랐습니다. 민주주의를 짓밟는 독재자를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광주일고에서, 당신은 경기고에서 박정희 유신체제를 반대하였습니다. 우리는 일신의 출세와 부귀를 우습게 보았습니다. 인생을 부와 권력에 맡기기엔, 우리의 청춘이 너무 고귀하였고, 젊음을 독재자의 하수인으로 살기엔 우리의 자존감이 너무 높았습니다. 헌신짝처럼 대학을 버리고 공장으로 갔습니다. 우리는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을 위한 길고 긴 장정에 나섰으나, 당면한 시대의 문제를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박종철군이 공권력에 의해 숨지자 우리는 신속하게 행동에 나섰습니다. ‘살인 고문 강간 정권을 타도하자’는 격문을 뿌렸고, 부천역 앞에서 군중 시위를 주도하였습니다. 다시 서울의 명동으로 달려가 군중 시위를 주도하였습니다. 1987년 6월 인천에서 전개된 군중 시위의 대부분은 우리의 손에서 결정되었고, 집행되었습니다. 우리는 대중과 함께하는 실천을 바탕으로, 마침내 ‘인천지역 민주노동자연맹’의 창립을 선포했습니다. 우리의 판단은 늘 정확했습니다. 1987년 가을 대통령선거에서 김영삼씨와 김대중씨가 경합하는 것은 민주진영의 공멸이라 보았고, 민주연립정부 수립을 목표로 민중후보를 추대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1987년과 1988년 두 여름은 뜨거웠습니다. 노동자의 대파업이 한반도를 휩쓸었습니다. 이 시기 당신은 민주노총의 건설을 노동운동의 조직적 목표로 제시했습니다. 정확한 판단이었습니다. 우리는 공리공론에 휩쓸리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우리는 낡은 이론에 얽매이는 것에도 반대했습니다. 우리는 소수의 혁명가가 운영하는 비합법적 정당이 시대에 뒤떨어진 것임을 확인하면서 더 이상 집착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진보적 대중정당이라는 더 힘든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우리는 논쟁은 하되 다투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는 나이를 따지지 않았고, 논쟁의 결과에 관계없이 상대의 의견을 존중할 줄 알았습니다. 늘 소수 의견이었던 나의 주장을 실천적으로 수용한 것은 당신이었습니다. 우리의 이야기는 모두 철학이었고, 해학이었습니다. 우리는 일신에 다가오는 위험 때문에 가야 할 길을 비켜 가지 않았습니다. 1989년 가을이었습니다. 우리는 <사회주의자>를 발간하였죠. 그것은 모두의 꿈이었던 ‘노동자 정당 건설’을 향한 대담한 도전이었습니다. 당시 잡히면 넥타이 공장에 갈(사형선고의 은어), 가장 위험한 길을 선택했음에도 우리는 마음이 편했습니다. <사회주의자>를 발간하고 우리는 신림동의 어느 주점에 들렀지요.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았는지 모르겠습니다. 밤이 이슥한 것도 잊으며 마셨는데 청하 두상자를 비웠더랬지요. 어머님의 손을 잡고 투옥된 삼촌께 면회 가던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들은 것은 그 무렵이었습니다. 1989년 12월 당신은 치안본부에 체포되었고, 국가보안법 위반이라는 죄명으로 옥고를 치렀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선택에 대해 늘 비판적인 사유를 하였습니다. 1993년, 3년간의 옥고를 치르고, 당신은 광주를 방문했습니다. 그때 나는 가장 혹독한 생활고에 시달렸고, 미친 듯, 무등산을 헤매고 다녔습니다. 길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나는 당신을 만나, ‘우리가 걸어온 길에 한가지의 오류가 있었던 것 같다. 그게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당신은 ‘우리의 선택 중에 잘못은 없다’고 말했죠. 이후 당신은 진보정당을 만드는 일의 선봉 역을 담당하였고, 모든 역경과 고난을 다 이겨왔습니다. 그 어떤 곤란에도 흔들리지 않았던 당신이었습니다. 그런 당신이 여기에서 삶을 그만두다니요? 덫에 걸린 당신, 몸부림쳤을 당신의 최후가 나의 영혼을 찢습니다. 모두가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을 만들자고 뛰어든 진보정당 운동이었는데, 이렇게도 진보정당의 가는 길이 힘들다니 너무나 억울하고 분통합니다. 선장을 잃은 진보정당의 조각배는 이제 무엇에 의지하여 망망대해를 헤쳐나가야 하나요?
합수 윤한봉 기념사업회 상임이사· 전 민주노동당 정치연수원장 마지막 어머님을 뵙고 나오는 당신의 발걸음은 얼마나 무거웠나요? 우리는 30년 전 분신을 반대했습니다. 죽는 것보다 더 끈질긴 강인함으로 살아 끝까지 운동해야 한다고 주장한 우리였습니다. 그 시절 노동 현장에서 캠퍼스에서 발생하는 동료들의 분신과 투신을 막아야 한다고, 어떤 욕을 먹더라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던 당신이었잖아요? 그랬습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순박했습니다. 약자를 돕고, 강자와 맞서는 것이 정의로운 삶이라고 배우며 자랐습니다. 민주주의를 짓밟는 독재자를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광주일고에서, 당신은 경기고에서 박정희 유신체제를 반대하였습니다. 우리는 일신의 출세와 부귀를 우습게 보았습니다. 인생을 부와 권력에 맡기기엔, 우리의 청춘이 너무 고귀하였고, 젊음을 독재자의 하수인으로 살기엔 우리의 자존감이 너무 높았습니다. 헌신짝처럼 대학을 버리고 공장으로 갔습니다. 우리는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을 위한 길고 긴 장정에 나섰으나, 당면한 시대의 문제를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박종철군이 공권력에 의해 숨지자 우리는 신속하게 행동에 나섰습니다. ‘살인 고문 강간 정권을 타도하자’는 격문을 뿌렸고, 부천역 앞에서 군중 시위를 주도하였습니다. 다시 서울의 명동으로 달려가 군중 시위를 주도하였습니다. 1987년 6월 인천에서 전개된 군중 시위의 대부분은 우리의 손에서 결정되었고, 집행되었습니다. 우리는 대중과 함께하는 실천을 바탕으로, 마침내 ‘인천지역 민주노동자연맹’의 창립을 선포했습니다. 우리의 판단은 늘 정확했습니다. 1987년 가을 대통령선거에서 김영삼씨와 김대중씨가 경합하는 것은 민주진영의 공멸이라 보았고, 민주연립정부 수립을 목표로 민중후보를 추대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1987년과 1988년 두 여름은 뜨거웠습니다. 노동자의 대파업이 한반도를 휩쓸었습니다. 이 시기 당신은 민주노총의 건설을 노동운동의 조직적 목표로 제시했습니다. 정확한 판단이었습니다. 우리는 공리공론에 휩쓸리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우리는 낡은 이론에 얽매이는 것에도 반대했습니다. 우리는 소수의 혁명가가 운영하는 비합법적 정당이 시대에 뒤떨어진 것임을 확인하면서 더 이상 집착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진보적 대중정당이라는 더 힘든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우리는 논쟁은 하되 다투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는 나이를 따지지 않았고, 논쟁의 결과에 관계없이 상대의 의견을 존중할 줄 알았습니다. 늘 소수 의견이었던 나의 주장을 실천적으로 수용한 것은 당신이었습니다. 우리의 이야기는 모두 철학이었고, 해학이었습니다. 우리는 일신에 다가오는 위험 때문에 가야 할 길을 비켜 가지 않았습니다. 1989년 가을이었습니다. 우리는 <사회주의자>를 발간하였죠. 그것은 모두의 꿈이었던 ‘노동자 정당 건설’을 향한 대담한 도전이었습니다. 당시 잡히면 넥타이 공장에 갈(사형선고의 은어), 가장 위험한 길을 선택했음에도 우리는 마음이 편했습니다. <사회주의자>를 발간하고 우리는 신림동의 어느 주점에 들렀지요.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았는지 모르겠습니다. 밤이 이슥한 것도 잊으며 마셨는데 청하 두상자를 비웠더랬지요. 어머님의 손을 잡고 투옥된 삼촌께 면회 가던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들은 것은 그 무렵이었습니다. 1989년 12월 당신은 치안본부에 체포되었고, 국가보안법 위반이라는 죄명으로 옥고를 치렀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선택에 대해 늘 비판적인 사유를 하였습니다. 1993년, 3년간의 옥고를 치르고, 당신은 광주를 방문했습니다. 그때 나는 가장 혹독한 생활고에 시달렸고, 미친 듯, 무등산을 헤매고 다녔습니다. 길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나는 당신을 만나, ‘우리가 걸어온 길에 한가지의 오류가 있었던 것 같다. 그게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당신은 ‘우리의 선택 중에 잘못은 없다’고 말했죠. 이후 당신은 진보정당을 만드는 일의 선봉 역을 담당하였고, 모든 역경과 고난을 다 이겨왔습니다. 그 어떤 곤란에도 흔들리지 않았던 당신이었습니다. 그런 당신이 여기에서 삶을 그만두다니요? 덫에 걸린 당신, 몸부림쳤을 당신의 최후가 나의 영혼을 찢습니다. 모두가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을 만들자고 뛰어든 진보정당 운동이었는데, 이렇게도 진보정당의 가는 길이 힘들다니 너무나 억울하고 분통합니다. 선장을 잃은 진보정당의 조각배는 이제 무엇에 의지하여 망망대해를 헤쳐나가야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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