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냐면 |
[왜냐면] 스마트하지 않게 살아보기 / 임도원 |
임도원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고일로
아무 생각 없이 반복적으로 비슷한 스포츠 기사들을 뒤적거리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을 때 불현듯 결심이 섰다. 딱히 대단한 사명감이나 투철한 의지는 아니었다. 뭔가 큰 변화를 기대하거나 깨달음을 얻고자 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스마트 세상 속에 매몰돼 버린 듯한 나 자신이 조금 딱하게 느껴졌을 따름이다. 그렇게 나는 지난 6년여간 써온 스마트폰과 작별했다.
막상 결심이 서니 행동으로 옮기기는 어렵지 않았다. 집 안을 뒤져 동생이 고3 때 쓰던 폴더폰을 찾아내고 충전기를 샀다. 저렴한 스마트폰도 많은데 왜 굳이 3G폰을 쓰느냐는 대리점 직원의 의아해하는 표정은 가볍게 웃어넘겼다.
위기는 생각보다 빠르게 찾아왔다. 오래전부터 생각해왔던 나홀로 제주도 여행을 스마트폰 없는 상태로 감행했다. 역시나 불편했다. 어디서 몇 번 버스를 어느 방향으로 탈 것인지 전날 미리 조사한 뒤 노트에 적어서 다녔고, 새로 찾아가는 장소의 위치를 잘 몰라 간간이 있는 표지판에 의존하거나 주변 사람들에게 많이 물어봤다. 물론 가장 큰 불편함은 심심함 그 자체였다. 정류장에 앉아 버스를 기다리면서, 그리고 버스를 타고 목적지로 이동하면서 ‘할 게 없어서’ 꽤나 심심했다. 엠피스리(MP3)를 꺼내 노래를 들었지만 그것만으로 해소되지 않는 심심함이 있었다.
이 막연한 심심함을 견디기 위해 나는 다양한 시도를 했다. 일단 주변 사람이나 사물을 관찰했고, 떠오르는 생각을 마구잡이로 노트에 메모했다. 책을 들고 다니며 조금씩 펴 보기도 했다. 그래도 아마 가장 많은 시간은 ‘멍 때리기’로 보낸 것 같다. 차창 밖을 내다보며 풍경을 감상하다가 어느 순간 아무 생각이 없어지고, 영혼이 빠져나간 듯한 ‘멍 상태’에 도달하곤 했다.
집에 돌아와서도 이 대책 없는 심심함과 멍 때리기는 계속되었다. 인생의 20%를 길 위에서 보낸다는 경기도민인지라 서울에서 약속을 잡으면 기본 2시간 정도는 버스나 지하철 안에서 심심하게 보낸다. 한데 요즘 들어 이 심심함이 그다지 나쁘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심심함은 창의성의 근원이라는 전문가들의 말은 딱히 와닿지 않지만,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나 자신이 오히려 편하게 느껴진다. 내가 굳이 실시간으로 북-미 정상회담의 발언을 보고받고, 연예인들의 열애 사실을 파고들며, 호날두의 해트트릭 장면을 확인할 필요는 없다고 느끼는 것이다. 친구가 오늘 점심으로 무엇을 먹었는지 몰라도 된다는 것은 덤으로 얻은 행운이다.
우리 모두가 스마트폰을 집어던지고 옛날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기술문명이 발달하고, 생활양식이 바뀌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다만 최근 제주도의 한 카페에서 본 ‘스마트한’ 일가족의 모습은 우리네 삶 어딘가에 문제가 있다는 확신을 주었다. 본의 아니게 바로 앞에 앉은 가족의 모습을 관찰하게 되었는데, 안타깝게도 4명 모두 각자의 스마트폰에 고개를 처박고 있었다. 아버지가 야구를 보는 동안 옆자리 아들은 게임 속 전사로 활약하고, 건너편 딸이 예능을 보며 킥킥거리는 동안 어머니는 연신 다른 사람 소식에 ‘좋아요’를 눌러댔다. 이제는 함께 있을 때도 잠깐의 심심함마저 못 참는 것인가 싶어 씁쓸했다.
셰리 터클이라는 매사추세츠공대(MIT) 교수는 진즉에 기술과 인생의 상호 역학관계를 연구해 <대화를 잃어버린 사람들>이라는 책을 펴냈다. 아주 훌륭한 책이지만, 우리는 굳이 이런 과학적 분석을 들이대지 않더라도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직감으로 알고 있다. 그 해결 방안으로 모두가 조금씩 심심함을 견디는 능력을 길러볼 것을 제안한다. 일단은 다른 사람을 마주하면 스마트폰을 내려놓는 연습부터 시작하고, 혼자 있을 때도 스마트폰과 잠시 거리를 두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나도 고작 한 달 실천한 일이지만 막상 해보니 꽤나 괜찮은 경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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