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8.04.30 18:32 수정 : 2018.04.30 19:13

라일라 휴스
국제환경법센터 선임변호사

투자자-국가 분쟁해결제도(ISDS)는 12년 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당시 가장 뜨거운 쟁점이었고, 지난달 한·미 양국이 원칙적 합의를 본 한-미 에프티에이 개정 협상에서도 주요 의제 중 하나였다. 투자자-국가 분쟁해결제도를 손봐야 한다는 주장은 이 제도를 전세계에 전파했던 미국이 가장 적극적으로 펴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밀어붙이고 있는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개정 협상에서 미국 무역대표부(USTR)는 투자자-국가 분쟁해결제도를 삭제하자는 입장을 내기도 했다. 독립성을 갖추지 못한 민간인 중재자가 재판 절차도 없이 분쟁의 결론을 내는 것은 사법주권을 침해하고 공공정책을 무력화한다는 이유에서다. 투자자-국가 분쟁해결제도 자체가 위협을 받자 이를 유지하려는 시도가 유럽연합(EU)에서 추진되고 있다.

지난 23~27일 미국 뉴욕에서 열린 유엔 국제상거래법위원회(UNCITRAL) 실무그룹 2차 회의가 바로 유럽연합의 이러한 시도를 논의하는 자리였다. 전세계 수백개의 무역협정에 들어 있는 투자자-국가 분쟁해결제도의 개혁 방안을 다루는 이 회의의 결과는 한국의 법 제도와 공공이익을 보장하려는 한국의 정책 역량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유럽연합은 이 회의에서 투자자-국가 분쟁해결제도 개혁 방안으로 ‘다자간 투자법원’의 창설을 주장하고 나섰다. 하지만 필자는 이것은 해결책이 아니라고 판단한다.

다자간 투자법원을 만들어 중재인을 판사로 바꾸자는 것이 유럽연합 제안의 핵심이다. 그러나 판사 역시 편향적일 수 있고, 이들이 “정부 친화적”일지 아니면 “기업 친화적”일지는 이들을 선발하는 절차에 따라 좌우될 수 있다. 이러한 핵심 문제, 즉, 판사의 선발 절차는 아직 합의되지 않았고 여전히 논쟁 중이다.

유럽연합이 제안한 다자간 투자법원의 근본적인 문제는 이미 망가진 투자자-국가 분쟁해결제도를 고착화한다는 점이다. 국민의 건강이나 환경을 보호하는 법과 규정에 대해 외국인 투자가가 자신의 이익이 침해되었다고 판단하면, 투자자는 정부를 다국적 투자법원으로 끌고 가 보상을 요구할 수 있게 된다. 가령 2015년 유엔총회가 채택한 ‘지속가능한 발전목표’나 온실가스 감축을 합의한 ‘파리기후변화협약’을 이행하려는 정부의 조치가 수십억달러의 분쟁에 휘말릴 가능성이 열리게 된다.

또한 다자간 투자법원이 만들어진다면, 기업의 투자를 보호하면서 국내법이나 인권법을 존중하라고 투자자에게 요구할 수가 없어진다. 그동안 투자자-국가 분쟁해결제도의 중재판정부가 투자자들이 뇌물이나 환경파괴와 같은 법 위반 행위를 했음에도 보상을 인정해 주었던 것처럼 말이다. 결국 다자간 투자법원 창설은 정의에 반하는 시스템을 제도화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지난달 초 유럽재판소는 유럽연합 역내 국가 사이의 양자간 투자협정의 투자자-국가 분쟁해결제도 조항이 유럽연합법을 위반한다고 판결했다. 주된 이유로는 중재판정부가 유럽연합법을 해석하고 그 유효성에 대한 결정을 내리는 것은 유럽연합의 법률 체계와 사법제도의 일관성을 훼손한다는 점을 꼽았다. 한국의 대법원도 한-미 에프티에이 체결 당시 이와 유사한 우려를 표명한 바 있다.

유럽재판소의 판결 근거에 비춰 보면, 유럽연합과 그 회원국들은 다른 곳도 아닌 유럽연합이 제안한 다자간 투자법원 제도에 참여하는 것이 유럽연합법 위반이라서 금지될 가능성도 있다.

한국 정부는 대중적 지지를 잃고 위기에 처한 투자자-국가 분쟁해결제도를 구하려는 유럽연합의 잘못된 시도(위법 가능성까지 있는 시도)를 지지할 것이 아니라 한국 사법제도의 일관성을 보장하는 다른 개혁방안을 찾아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사법주권을 유지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한국 정부가 지속가능한 발전을 선도하는 길이기를 바란다.

광고

브랜드 링크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