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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4.23 18:43 수정 : 2018.04.23 19:14

한기호
탈분단 칼럼니스트·연세대학교 통일학 박사수료

지난 2월,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백악관 내 집무실 오벌 오피스로 탈북민 8명을 초청하여 이들의 아픔과 용기에 공감을 표했다. 참석자 중 누군가는 북한 인권 개선을 위한 미국의 독자적인 움직임에 감사를 표했고, 또 다른 이는 최근 미국 시민권을 획득해 미국 국민이 되어 매우 영광이라고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대단하고 환상적인 일이라고 화답했다.

혹자는 이런 자리 자체가 남북한 대화와 해빙 무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우려할 수 있으나, 탈북민 지원 사업의 현장에서 오랜 기간 이들을 지켜본 필자로서는 트럼프 대통령과 미국에 대한 탈북민들의 감격에 이해되는 대목이 있다.

(7개의 이름을 가진 소녀)의 지은이인 이현서씨는 이날 배석한 자리에서 북한을 떠난다는 것은 어떤 나라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우주를 떠나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분단 이후 국내에 입국한 탈북민 3만2천명, 우리 사회는 ‘떠나온 우주’에 관한 그들만의 정서를 그대로 인정할 필요가 있다.

모처럼 찾아온 한반도의 봄은 우리의 반색을 끌어내기에 부족함이 없다. 실은 저마다의 이유로 그 이상을 진전을 기대하는 사람들이 많다. 남한 사람들은 평화협정으로 전쟁 위험이 속히 종식되기를 기대하며, 일부 탈북민들은 생각보다 이른 시일에 고향 땅을 밟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기도 한다. 상대와의 긴장된 관계에서 해빙 무드로 이완되는 과정에서는 상대의 치부를 드러내거나 공략하지 않는 외교관례가 있다. 한편 2018 남북 정상회담의 성공적 분위기가 감지되고 있다. 나아가 평화협정과 북-미 수교로 이어질 거라는 낙관론도 등장하고 있다. 그래서 북-미 회담의 가교 역할을 자임한 이번 남북 정상회담의 주요 의제로 탈북민과 북한 인권 문제가 거론되는 것은 협상전략에 부합하지 않을 수 있다. 이런 부분을 탈북민들도 일면 이해하고 있다.

다만 적절한 시기에, 인권변호사 출신인 문재인 대통령이 외교적 자신감을 기반으로 국내에 정착 중인 탈북민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무연고 탈북 청소년을 청와대로 초청하여 이들을 격려하고 위로하는 행사를 고려할 수 있다. 한반도 긴장 완화의 흐름상 신중을 거듭해야 하는 대목이긴 하나, 보통국가를 지향하는 김정은 정부로부터 남한 내 탈북민에 대한 우회적인 지지를 끌어내거나 국제사회의 북한 인권 상황에 대한 우려를 불식할 방안을 역제안할 수도 있다. 향후 추진될 가능성이 유력한 이산가족 상봉 시 분단 이후의 실향민인 탈북민 가정을 포함시키는 것도 고려 대상이다. 이러한 제안들은 파격에 파격을 거듭 중인 남북대화 국면의 진전 정도에 따라 협상카드의 부가적 의제가 될 수 있다.

기본적으로 탈북민들은 독재의 피해를 입은 이들이며 숨길 수 없는 분단의 후과다. 더구나 남한 사회 내 소수자로, 민주주의를 쟁취해온 한국 역사에 부합하는 이들이다. 또한 이들은 한국 국민이기 이전에 탈북민인 것이 아니라, 탈북민이기 이전에 한국 국민이다. 고향 땅을 그리워하는 이들의 목소리가 정치적인 고려로 쉬이 생략되어서는 곤란하다.

그간 탈북민 어젠다는 보수 진영이 선점해왔다. 이 과정에서 유엔의 북한인권조사위원회(COI) 설립을 끌어내 국제사회에 그들의 험난했던 역사를 알리는 데 기여한 측면은 인정받아야 한다. 다만 전반적인 의제 설정과 해결 과정이 여러 단체의 진정 어린 활동에도 불구하고 냉전의 옷을 빌려 입은 채 응보적 관점과 해석에 머물렀던 것 역시 사실이다.

이러한 경향으로 탈북민 의제의 접근방식이 제한되어 왔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종합편성채널 등의 일부 미디어는 ‘탈북자’라는 이름으로 소수 진영에 가두어 그들의 아픔을 곡해했고, 일부 세력은 그들의 목소리를 정치적 안보 어젠다로 활용하기에 급급했다. 이런 연유로 북한 주민들은 보통사람의 꿈을 안고 분단 이후 끊임없이 우리 사회를 노크해 왔지만 대중은 이들을 이웃, 소시민이라고 느끼기 이전에 ‘냉전 전문가(스페셜리스트)’로 보아왔다. 탈북민 커뮤니티 내에서도 이런 시선에 대해 불만 어린 목소리가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70%의 지지를 받는 현 정부가 이들에게 적용되던 보수-진보 프레임에 균열을 내주길 바란다. 그리하면 진보진영은 탈북민 문제를 외면한다는 세간의 오래된 의혹을 불식할 수 있다. 필자가 경험한 북한이탈주민은 그리 정치적이거나 계산적이지 않고, 진영 논리를 달가워하지 않는 사람들이기에 이와 같은 정부의 노력에 고마워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진보 정부-탈북민 커뮤니티 모두 각자의 외연을 넓힐 수 있다.

탈북민 이슈는 안보, 인권, 소수자적 인식을 넘어 통일 준비 과정에서 우리 생각 이상으로 파급력 있는 의제가 될 가능성이 높다. 진보진영이 탈북민을 대상으로 침묵했던 과거를 청산할 시점이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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