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12.01 18:09
수정 : 2005.12.01 18:09
왜냐면
세계적인 연구는 당연히 세계적이고도 보편적 윤리 기준이 필요하다. 이러한 보편적 도덕과 윤리를 무시한다면 우리는 스스로 사회의 도덕적 규범을 낮추는 꼴이다.
황우석 교수와 〈피디수첩〉이 촉발시킨 이번 파문으로 인해 ‘국익’의 깃발이 세상을 뒤덮은 듯하다. 사실 국익이 윤리에 우선한다는 주장에 딱히 아니라고 단언하기도 쉽지 않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윤리가 국익에 뒤지는 것도 아니다. 국익이 국민에게 봉사하는 만큼 윤리도 우리 삶을 위해 봉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국익과 윤리가 격돌하는 분노와 저주의 난장판 속에서 우리가 잊고 있는 것은 바로 대학과 교수의 윤리 문제가 아닌가 싶다. 황 교수는 국립대학의 교수이고 그의 연구는 그 울타리 안에서 이루어졌으므로 그에 따른 판단도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본다.
우선 구조상의 문제다. 대학에서의 연구가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경우 그 연구는 윤리심의위원회의 검증을 통과해야 한다. 문제는 서울대 수의대학의 기관윤리위원회는 이제까지 황 교수의 연구에 아무런 기능을 하지 못하다가 피디수첩 방영 이후에야 면피성 조사 결과를 내놓았다는 점이다. 황 교수의 연구에 윤리적 문제가 있다는 지적은 지난해 봄 생명윤리학회와 시민단체, 그리고 영국의 〈네이처〉 쪽에서 국내외에서 거의 동시에 제기했는데도 황 교수는 물론 서울대도 일년 반을 굳세게 모른 척하고 있었다. 이는 윤리 문제에 대한 대학 관리시스템의 총체적 붕괴이다.
구조와 절차에 관한 문제 외에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스승과 제자간 권력관계가 개입하여 진행되는 연구 관행이다. 연구원이나 대학원생이 스스로 동의하는 경우도, 자발적으로 나서는 경우도 연구집단 내에 잠재된 권력관계에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권력구조가 강고하게 자리잡은 경우 그 구성원은 순응을 선택함과 동시에 자발적 동의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이 경우 눈에 보이는 자발성은 사실이 아니다.
뜬구름 잡는 윤리 이야기가 아니다. 인권 문제이기에 이것은 타협의 대상이 될 수도, 두 번 생각할 일도 아니다. 특히 이번 파문은 이 시대의 지성을 배출하는 대학에서 벌어진 문제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이를 과학의 급속한 발전속도 때문에 일어난 윤리지체 현상으로 너그럽게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계적인 연구는 당연히 세계적이고도 보편적 윤리 기준이 필요하다. 이러한 보편적 도덕과 윤리를 무시한다면 우리는 스스로 사회의 도덕적 규범을 낮추는 꼴이다.
우리는 변방에서 너무나도 오랫동안 시달렸던 과거 때문인지 세계를 향해 무언가 보여야 한다는 민족적 의무감이 지나쳐 일종의 강박을 갖게 된 것 같다. 개발독재가 본격화된 1970년대부터 수시로 펄럭였던 동양 최대, 아시아 최초, 세계 몇 번째 등의 수사에 온 국민이 감격해했고 경제가 안정된 지금도 ‘세계 몇 번째’에 일희일비하고 있다. 지나친 강박은 집착을 낳는다. 그러한 집착이 결국 결과만을 좇고 과정을 무시해버리는 현실을 낳았다. 우리도 이제 이만하면 우리 자신에게 여유를 선사할 때도 되었다.
정희준/동아대학교 체육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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