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신대 사회학과 강사 30년 만에 두번째로 치러진 올림픽이 평화와 안녕을 기원하며 막을 내렸다. 그러나 올림픽을 악몽으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 기억은 꼬박 30년째 계속되고 있다. 바로 86 아시아경기대회와 88 서울올림픽을 위해 사회에서 격리됐던 사람들의 얘기다. 그들은 행색이 더럽다는 이유로, 다른 시설에서 도망 나왔다가, 누이와 함께 아버지를 기다리다, 재혼한 아버지에 의해 버려져, 잃어버린 아이를 수소문해 찾아왔다가, 붙잡히고 감금됐다. 감금된 사람들은 폭행과 강간과 중노동에 시달리다 1987년 초 500명이 넘는 사람들이 그 안에서 죽었다는 게 알려지면서 풀려났다. 그러나 끝이 아니었다. 다른 시설로 보내졌다가 도망 나온 아이는 함께 살자는 아주머니를 따라갔다가 돈 한 푼 받지 못하고 노예처럼 일을 해야 했고, 아무 대책 없이 풀려나 거리를 전전하던 청년은 고기잡이배에 팔려갔다가 죽기 직전에 풀려났다. 함께 감금됐던 누이와 아버지는 학대와 폭행의 후유증으로 30년째 정신병원에 입원 중이며 다시 만난 가족은 잃어버렸다는 죄책감과 버려졌다는 원망을 화해하지 못한 채 남이 되고 말았다. 감금됐을 때 목격한 죽음은 나와서도 이어졌다. 안에서는 병들고 맞아서 죽었다면 밖에서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원통한 마음을 풀지 못한 채 제 손으로 생을 마감하는 일이 계속되고 있다. 형제복지원 생존자들의 얘기다. 그들의 피해는 단지 감금된 몇 년에 국한되지 않았다. 한국 사회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부조리와 모순이 그들의 인생을 잠식하고 파괴했다. 누구도 꿈이 무엇인지 물어봐주지 않았고 스스로 자신의 삶을 선택할 수도 없었다. 1987년 1월, 실태가 알려지면서 잠시 떠들썩한 보도가 있었지만 곧이어 일어난 6월 항쟁의 물결 속에 사건은 묻히고 말았다. 그 뒤로도 오래 세상은 그 사람들을 잊고 있었다. 누구도 그들을 대신해 말해주지 않았다. 그러나 다행히도, 스스로를 말하기 시작했다. 2012년, 살아남은 한 아이가 성인이 되어 국회 앞에서 1인시위를 한 게 시작이었다. 언론에 보도되면서 생존자들이 하나둘 모였다. 농성과 청원을 반복하다가 작년 가을에는 부산 형제복지원 터에서 서울 청와대까지 500㎞를 걸었다. 그리고 11월7일부터는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며 국회 앞 노숙농성을 이어오고 있다. 생존자들은 피해 보상과 함께 국가의 사과를 요구한다. 형제복지원 이사장 박인근이 주범으로 기소됐지만 고작 2년6개월의 형을 살고 나온데다 그는 하수인에 불과해서다. 도시미화와 사회질서를 빌미로 그들을 감금하도록 지시하고 아무 대책 없이 세상에 내보내 다시 고통의 나날을 겪게 한 것은 바로 국가였다. 그런데 국가만 사과하면 될 일인가. 잡혀갈 때 박수 치고, 갇혀 있는 걸 방관하고, 나온 뒤에 다시 그들을 약탈한 사람들에게는 죄가 없는가. 그들은 묻는다. 가난한 사람은 모두 부랑아냐고, 또 부랑아라고 해서 사람을 함부로 가두고 때리고 죽여도 되느냐고. 그리고 또 그들은 궁금해한다. 모르지 않았을 텐데. 복지원이 있던 부산시 주례동 사람들은 알았을 테고, 복지원과 수용자를 주고받은 다른 시설에서 알았을 테고, 나아가 부산시에서 알았을 텐데 왜 그 오랜 시간 동안 그들을 못 본 척했느냐고. 이 사건의 본질은 국가가 주도하고, 민간이 약탈하고, 국민이 방관한 데 있다. 사과할 곳은 국가만이 아니다. 모두가 사과해야겠지만 가장 먼저 부산시 당국이 사과해야 한다. 그중에서도 사회운동단체의 책임은 더욱 무겁다. 그들은 권력에 대한 감시를 소임으로 자처했기 때문이다. 더 큰 권력을 감시하느라, 더 중요한 권리를 위해 일하느라 간과했다는 변명은 용납되기 어렵다. 무려 30년이다. 이제 진정한 사과로 30년의 침묵을 깨야 한다.
왜냐면 |
[왜냐면] 형제복지원 사건, 부산시부터 사과해야 한다 / 임미리 |
임미리
한신대 사회학과 강사 30년 만에 두번째로 치러진 올림픽이 평화와 안녕을 기원하며 막을 내렸다. 그러나 올림픽을 악몽으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 기억은 꼬박 30년째 계속되고 있다. 바로 86 아시아경기대회와 88 서울올림픽을 위해 사회에서 격리됐던 사람들의 얘기다. 그들은 행색이 더럽다는 이유로, 다른 시설에서 도망 나왔다가, 누이와 함께 아버지를 기다리다, 재혼한 아버지에 의해 버려져, 잃어버린 아이를 수소문해 찾아왔다가, 붙잡히고 감금됐다. 감금된 사람들은 폭행과 강간과 중노동에 시달리다 1987년 초 500명이 넘는 사람들이 그 안에서 죽었다는 게 알려지면서 풀려났다. 그러나 끝이 아니었다. 다른 시설로 보내졌다가 도망 나온 아이는 함께 살자는 아주머니를 따라갔다가 돈 한 푼 받지 못하고 노예처럼 일을 해야 했고, 아무 대책 없이 풀려나 거리를 전전하던 청년은 고기잡이배에 팔려갔다가 죽기 직전에 풀려났다. 함께 감금됐던 누이와 아버지는 학대와 폭행의 후유증으로 30년째 정신병원에 입원 중이며 다시 만난 가족은 잃어버렸다는 죄책감과 버려졌다는 원망을 화해하지 못한 채 남이 되고 말았다. 감금됐을 때 목격한 죽음은 나와서도 이어졌다. 안에서는 병들고 맞아서 죽었다면 밖에서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원통한 마음을 풀지 못한 채 제 손으로 생을 마감하는 일이 계속되고 있다. 형제복지원 생존자들의 얘기다. 그들의 피해는 단지 감금된 몇 년에 국한되지 않았다. 한국 사회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부조리와 모순이 그들의 인생을 잠식하고 파괴했다. 누구도 꿈이 무엇인지 물어봐주지 않았고 스스로 자신의 삶을 선택할 수도 없었다. 1987년 1월, 실태가 알려지면서 잠시 떠들썩한 보도가 있었지만 곧이어 일어난 6월 항쟁의 물결 속에 사건은 묻히고 말았다. 그 뒤로도 오래 세상은 그 사람들을 잊고 있었다. 누구도 그들을 대신해 말해주지 않았다. 그러나 다행히도, 스스로를 말하기 시작했다. 2012년, 살아남은 한 아이가 성인이 되어 국회 앞에서 1인시위를 한 게 시작이었다. 언론에 보도되면서 생존자들이 하나둘 모였다. 농성과 청원을 반복하다가 작년 가을에는 부산 형제복지원 터에서 서울 청와대까지 500㎞를 걸었다. 그리고 11월7일부터는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며 국회 앞 노숙농성을 이어오고 있다. 생존자들은 피해 보상과 함께 국가의 사과를 요구한다. 형제복지원 이사장 박인근이 주범으로 기소됐지만 고작 2년6개월의 형을 살고 나온데다 그는 하수인에 불과해서다. 도시미화와 사회질서를 빌미로 그들을 감금하도록 지시하고 아무 대책 없이 세상에 내보내 다시 고통의 나날을 겪게 한 것은 바로 국가였다. 그런데 국가만 사과하면 될 일인가. 잡혀갈 때 박수 치고, 갇혀 있는 걸 방관하고, 나온 뒤에 다시 그들을 약탈한 사람들에게는 죄가 없는가. 그들은 묻는다. 가난한 사람은 모두 부랑아냐고, 또 부랑아라고 해서 사람을 함부로 가두고 때리고 죽여도 되느냐고. 그리고 또 그들은 궁금해한다. 모르지 않았을 텐데. 복지원이 있던 부산시 주례동 사람들은 알았을 테고, 복지원과 수용자를 주고받은 다른 시설에서 알았을 테고, 나아가 부산시에서 알았을 텐데 왜 그 오랜 시간 동안 그들을 못 본 척했느냐고. 이 사건의 본질은 국가가 주도하고, 민간이 약탈하고, 국민이 방관한 데 있다. 사과할 곳은 국가만이 아니다. 모두가 사과해야겠지만 가장 먼저 부산시 당국이 사과해야 한다. 그중에서도 사회운동단체의 책임은 더욱 무겁다. 그들은 권력에 대한 감시를 소임으로 자처했기 때문이다. 더 큰 권력을 감시하느라, 더 중요한 권리를 위해 일하느라 간과했다는 변명은 용납되기 어렵다. 무려 30년이다. 이제 진정한 사과로 30년의 침묵을 깨야 한다.
한신대 사회학과 강사 30년 만에 두번째로 치러진 올림픽이 평화와 안녕을 기원하며 막을 내렸다. 그러나 올림픽을 악몽으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 기억은 꼬박 30년째 계속되고 있다. 바로 86 아시아경기대회와 88 서울올림픽을 위해 사회에서 격리됐던 사람들의 얘기다. 그들은 행색이 더럽다는 이유로, 다른 시설에서 도망 나왔다가, 누이와 함께 아버지를 기다리다, 재혼한 아버지에 의해 버려져, 잃어버린 아이를 수소문해 찾아왔다가, 붙잡히고 감금됐다. 감금된 사람들은 폭행과 강간과 중노동에 시달리다 1987년 초 500명이 넘는 사람들이 그 안에서 죽었다는 게 알려지면서 풀려났다. 그러나 끝이 아니었다. 다른 시설로 보내졌다가 도망 나온 아이는 함께 살자는 아주머니를 따라갔다가 돈 한 푼 받지 못하고 노예처럼 일을 해야 했고, 아무 대책 없이 풀려나 거리를 전전하던 청년은 고기잡이배에 팔려갔다가 죽기 직전에 풀려났다. 함께 감금됐던 누이와 아버지는 학대와 폭행의 후유증으로 30년째 정신병원에 입원 중이며 다시 만난 가족은 잃어버렸다는 죄책감과 버려졌다는 원망을 화해하지 못한 채 남이 되고 말았다. 감금됐을 때 목격한 죽음은 나와서도 이어졌다. 안에서는 병들고 맞아서 죽었다면 밖에서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원통한 마음을 풀지 못한 채 제 손으로 생을 마감하는 일이 계속되고 있다. 형제복지원 생존자들의 얘기다. 그들의 피해는 단지 감금된 몇 년에 국한되지 않았다. 한국 사회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부조리와 모순이 그들의 인생을 잠식하고 파괴했다. 누구도 꿈이 무엇인지 물어봐주지 않았고 스스로 자신의 삶을 선택할 수도 없었다. 1987년 1월, 실태가 알려지면서 잠시 떠들썩한 보도가 있었지만 곧이어 일어난 6월 항쟁의 물결 속에 사건은 묻히고 말았다. 그 뒤로도 오래 세상은 그 사람들을 잊고 있었다. 누구도 그들을 대신해 말해주지 않았다. 그러나 다행히도, 스스로를 말하기 시작했다. 2012년, 살아남은 한 아이가 성인이 되어 국회 앞에서 1인시위를 한 게 시작이었다. 언론에 보도되면서 생존자들이 하나둘 모였다. 농성과 청원을 반복하다가 작년 가을에는 부산 형제복지원 터에서 서울 청와대까지 500㎞를 걸었다. 그리고 11월7일부터는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며 국회 앞 노숙농성을 이어오고 있다. 생존자들은 피해 보상과 함께 국가의 사과를 요구한다. 형제복지원 이사장 박인근이 주범으로 기소됐지만 고작 2년6개월의 형을 살고 나온데다 그는 하수인에 불과해서다. 도시미화와 사회질서를 빌미로 그들을 감금하도록 지시하고 아무 대책 없이 세상에 내보내 다시 고통의 나날을 겪게 한 것은 바로 국가였다. 그런데 국가만 사과하면 될 일인가. 잡혀갈 때 박수 치고, 갇혀 있는 걸 방관하고, 나온 뒤에 다시 그들을 약탈한 사람들에게는 죄가 없는가. 그들은 묻는다. 가난한 사람은 모두 부랑아냐고, 또 부랑아라고 해서 사람을 함부로 가두고 때리고 죽여도 되느냐고. 그리고 또 그들은 궁금해한다. 모르지 않았을 텐데. 복지원이 있던 부산시 주례동 사람들은 알았을 테고, 복지원과 수용자를 주고받은 다른 시설에서 알았을 테고, 나아가 부산시에서 알았을 텐데 왜 그 오랜 시간 동안 그들을 못 본 척했느냐고. 이 사건의 본질은 국가가 주도하고, 민간이 약탈하고, 국민이 방관한 데 있다. 사과할 곳은 국가만이 아니다. 모두가 사과해야겠지만 가장 먼저 부산시 당국이 사과해야 한다. 그중에서도 사회운동단체의 책임은 더욱 무겁다. 그들은 권력에 대한 감시를 소임으로 자처했기 때문이다. 더 큰 권력을 감시하느라, 더 중요한 권리를 위해 일하느라 간과했다는 변명은 용납되기 어렵다. 무려 30년이다. 이제 진정한 사과로 30년의 침묵을 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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