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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1.22 18:30 수정 : 2018.01.22 19:10

민병갑
뉴욕시립대학교 대학원 및 퀸스칼리지 석좌교수·재외한인사회연구소 소장

한국에서 1980년대 후반에 시작한 ‘위안부’ 운동은 특히 미국에서 큰 호응을 얻었다. 1990년대와 2000년대에는 한국 위안부 할머니들이 당한 끔찍한 성노예 경험을 미국의 여러 대학과 단체의 청중에게 증언해 미국인의 마음을 울렸다. 증언을 들은 미국인들은 일본 대 한국의 역사 문제가 아니라 군의 포악한 성폭력으로 여성의 인권이 침해당했다는 인식에서 위안부 운동을 지지했다. 그런데 2010년대부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고령화돼 증언이 줄어들자 기림비와 소녀상을 세우는 운동으로 바뀌었다.

2010년 뉴저지를 시작으로 미국 곳곳에 13개 위안부 기림비 및 소녀상이 건립되었다. 이 중 12개는 한인운동가들이 한인 집중 거주 지역의 공공장소에 대부분 세웠다. 이렇게 미국인들에게 비극을 상기시킬 수 있었다. 또한 위안부 기림비나 소녀상을 세우려면 시의회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데, 이를 위해 지역주민과 정치인들이 참여하는 공청회를 거쳐야 한다. 이 과정이 위안부 이슈를 알릴 좋은 기회가 됐다.

지난해 9월 샌프란시스코에 위안부 기림비를 세웠다. 일본계 미국인이 가장 집중해 살고 있는 이 대도시에 한국, 중국, 필리핀 위안부 피해자가 서로 손을 꼭 잡고 있는 모형의 기림비가 건립된 것은 아주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일본계의 반발이 심해 시의회 통과가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는데 건립에 성공한 것은 기적 같은 일이다.

이 사업은 한인뿐 아니라 중국인, 일본인, 유대인 단체가 연대한 기념비건립위원회가 성사시켰다. 특히 중국계가 큰 공헌을 했다. 이 운동에 참여한 유대인 대표 주디스 머킨슨이 우리 재외한인사회연구소가 주최한 2017년 학술대회에서 발표한 논문에 의하면, 중국계 건립위원 대표인 릴리언 싱과 줄리 탕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오래 판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판사의 정치중립원칙 때문에 이들은 판사직 사퇴까지 하며 이 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들은 특히 중국 위안부와 중국 난징학살 희생자를 기리기 위해 참여를 결심했다. 유대인 단체도 2차 대전 당시 400만 유대인 학살이라는 가슴 아픈 역사가 있어서 적극 동참했다. 일본계 미국인 3~4세대 역시 2차 대전 당시 그들의 조상인 일본인 1~2세대가 미국 서부의 캠프에 강제 수용된 역사를 기억하기에 동참했다.

샌프란시스코 시의회에 수천개의 소수민족 및 여성 단체가 기림비 설립 지지 청원서를 냈다. 일부 일본계 단체들은 기림비가 세워지면 일본계 학생들이 인종혐오를 받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다른 진보적 일본인 단체들은 2013년 캘리포니아 글렌데일에 한국 위안부 소녀상을 세울 때도 그런 우려가 있었지만 그동안 일본인 혐오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반박했다.

미국 서부에서 일본 우익의 입장을 대변해온 고이치 메라 박사가 공청회에 참석해, 강제 동원되었다는 이용수 할머니의 증언에 반박하면서 위안소에 ‘매춘부로 팔려갔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공청회에 참석한 많은 청중은 할머니를 모독하는 발언이라고 고이치 박사를 맹비난했고, 기림비 건립을 반대하던 일부 의원들마저도 지지 쪽으로 선회했다고 한다.

샌프란시스코 기림비 문구는 공모를 통해 채택됐다. “우리가 가장 두려워해야 할 일은 2차 대전의 아픈 역사에 대한 기억을 잊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 아시아 ‘위안부’ 여성들에게 일어난 끔찍한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 우리는 기림비를 계속 세워야 한다. 머나먼 미국 땅에서도 계속하고 있는데 하물며 한국에서 왜 일본 정부가 기림비를 세울 수 없다고 주장하는가? 일본 정치인들이 엄청난 정부예산을 들여 기림비 건립 운동을 방해하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하지만 그 이유를 알 것도 같다. 그들은 여성을 성노예로 강제동원한 사실을 알기 때문에 기림비를 보면 양심의 가책을 받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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