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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1.10 18:12 수정 : 2018.01.10 22:17

하윤정/전 카페알바노동자

얼마 전까지 내 이름은 벨이었다. 내가 일했던 카페에서는 일하는 파트너 모두가 서로를 본명이 아닌 닉네임으로 부르는 것이 규칙이다. 평등하게 관계 맺고 소통하기 위함이다. 과연 그랬을까? 내가 일한 곳은 여의도 1번지, 국회 정문에서 직선거리로 가장 가까운 한 카페였다. 인근에는 큰 방송국과 소위 대기업으로 불리는 회사들이 위치하고 있다. 손님으로는 국회 안의 국회의원부터 국회 앞에서 농성하는 해고 노동자까지 다양했다. 지금부터 이 손님들을 매일 맞았던 벨의 속사정을 이야기해보려 한다.

시급 6600원짜리 정규직

시급 6600원, 주 5일 하루 5시간 일하는 가장 낮은 직급으로 입사했다. 근로계약서에 계약기간이 없다. 모든 매장은 직영이기 때문에 근로기준법에서 보장하는 주휴수당부터 야간·휴일·연장수당을 받을 수 있다. 회사 내 복지로 일하는 시간 동안 두 잔의 음료를 무료로 마실 수 있고, 모든 매장에서 사원증을 제시하면 30퍼센트 할인가격으로 음료를 사마실 수 있다.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정규직 알바다. 그러나 과연 꿀 알바일까? 계약기간의 만료일이 없고, 해고도 없기에 실업급여를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스케줄은 오픈, 미들, 마감 이렇게 있는데 다음 주 스케줄을 전 주 수요일에 공지를 해준다. 일하는 시간이 하루 다섯 시간으로 짧고 스케줄이 유동적인 것이 맘에 들어 입사하게 되었다.

본사 교육센터에서 교육을 5일 듣고 매장 첫 근무를 시작했다. 첫 주는 미들 스케줄을 받았다. 우리 매장은 12시부터 1시까지가 제일 바쁘다. 직장인들이 점심식사를 끝내고 커피를 사러오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미들 근무자들은 이 점심 러시를 뛴다. 점심 러시 때는 동시에 여섯 명의 파트너가 근무를 한다. 두 명이 주문을 받고, 세 명이 음료를 만든다. 음료를 만드는 세 명 중 한 명은 차가운 음료에 마지막으로 얼음을 채우거나, 컵 위에 뚜껑을 덮으면서 음료를 완성해 손님에게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 참고로 매장에는 진동 벨이 없다. 그래서 이 포지션에 배정된 사람은 생목으로 손님이 설정한 닉네임이나 영수증에 적힌 주문번호를 쉴 새 없이 불러야 한다.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은 수시로 여기저기를 오가며 필요한 일을 다 한다. 얼음 및 원두 채우기, 떨어진 원·부재료 갖다 나르기, 샌드위치나 빵 등을 데우기, 손님들이 아무렇게나 버리고 간 쓰레기들을 정리하기 등. 입사한 첫날 나는 온갖 일을 담당하는 포지션에 배정됐다. 발에 땀이 났다. 얼음을 제빙기에서 퍼 나르면서 얼음스쿱에 계속 부딪혀서 손등에는 시퍼런 멍이 들었다. 첫날부터 시간당 6600원을 받고 할 일이 아니란 걸 몸으로 부딪히며 깨달았다. 퇴근하며 점심시간 매출을 머릿속으로 계산해 봤다. 매장에서 판매하는 음료의 평균 가격이 5000원이라고 했을 때, 한 시간 동안 200잔은 팔았을 것이고, 그럼 100만 원이네라고 생각하니 내 시급이 너무 저렴하다 못해 가볍게 느껴졌다.

고작 하루 5시간 일하지만 쉬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계속 서있어야 했기에 허리와 다리가 너무 아팠다. 특히, 손님들이 버리고 간 일회용 컵들을 재활용하려면 그 컵들이 섞인 쓰레기통을 뒤져서 건져낸 다음, 다 분리해서 컵과 컵 뚜껑을 씻는 ‘컵 분리’라는 작업을 해야 한다. 쓰레기통을 뒤지는 고역은 참을 만했는데, 허리를 계속 숙여 컵들을 씻다보니 허리가 끊어져나갈 것 같았다. 일한지 2주가 지났을까. 어느 날부터 동반 입사한 동료가 보이지 않았다. 다른 동료에게 물어보니 힘들어서 그만뒀다고 했다. 몸도 몸이지만, 정신적으로도 힘들었다. 모르는 것들 투성이니 하나부터 열까지 배워야 했고, 동료들은 그런 나를 가르쳐야 했다. 주문을 받는 법부터 작게는 바닥을 쓸고 닦는 법까지. 이 매장에서 1인분의 몫을 해낼 때까지 말이다. 입사일이 제일 늦은 나는 점장부터, 내 전 입사자로부터 매일 피드백을 받아야 했다. “이렇게 해라.”, “이렇게 하지 마라.”, “왜 그렇게 하냐.” 등. 열 명의 선임 파트너가 있다면 열 가지 방식의 피드백이 있었다. 마치 사람마다 말하기 방식이 다른 것처럼. 제일 늦게 입사한 나는 그 피드백을 들어야만 했다.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지 못해서…

그러던 하루였다. 아침 출근 시간 대에 선임 파트너와 일을 하고 있었다. 평소처럼 일하는데 갑자기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라는 말이 들렸다. 뭐가 문젠지 몰라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선임 파트너를 쳐다봤다. “지금 뭐하시는 거냐고요”라고 또 물었다. “네? 그냥 평소처럼 한 건데요.” 자신 없이 대답했다. 선임 파트너는 “자기 자리에서 자기 일이나 제대로 하세요”라고 했다. 이 모든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유를 물을 수는 없었다. 바쁜 시간대였고, 우리는 빨리 음료를 만들어 손님에게 전달해야 했다. ‘자기 자리’는 어디고, ‘자기 일’은 뭘까. 답을 알 수 있는 능력이 내게 없었다. 그리고 일주일 뒤, 그 선임 파트너로부터 업무 포지션에 대한 교육을 받으면서 그때 내가 뭘 잘못했는지 알 수 있었다. 아침 출근 전 커피를 주문하는 손님들로 바쁜 아침 러시 때는 주어진 포지션에서 정해진 역할만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날 아침 나는 음료를 마무리해서 손님에게 주는 일을 하는 포지션이었는데, 컵에 손님이 주문한 음료가 마킹되어 있는 스티커를 붙이는 옆 포지션의 일도 하려고 했던 것이었다. 그 교육을 들으면서 선임 파트너는 “자신이 화가 난 것은 그 때문이었다”고 덧붙여 설명해줬다. 순간적으로 머릿속에 떠오른 한마디. ‘아니, 가르쳐주지도 않은 걸 나더러 하라고 한 거야?’ 물론 말하지는 않았다. 말할 수 없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입사하고 한 달 반 정도는 매일 때려치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매일 서 있는 것도, 가끔은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는 손님들을 설득하는 것도, 감정적이고 불명확한 피드백을 받는 것도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은 벌어야 했기에 버텨야만 했다. 그래서 버티기 위해 나는 나를 설득했다. ‘이게 사회생활이고, 직장생활이다. 남들도 다 이렇게 산다.’ 그렇게 버티며 적응했다. 까칠한 피드백을 적절히 넘기는 요령도 생겼다. “네.”,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배울 내용은 취하고, 까칠한 목소리는 한 귀로 흘렸다.

이게 다 대통령을 잘 뽑아서라고?

나는 6월 중순에 입사했다. 미들 출근하는 날에는 최저임금 1만 원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국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었다. 인근 매장에 부족한 물품을 빌리러 갈 때는 항상 마트 노동자들의 농성장을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내년도 최저임금이 7530원으로 결정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1만 원은 아니었지만, 1천 원이 넘는 인상액이라니. 반가웠다. 같이 일하는 동료에게 최저임금 인상 소식을 들었냐고 물었다. 동료는 모른다고 했고, 나는 인상 금액을 알려줬다. 동료는 내년까지 일해야겠다며 좋아했다. 그리고 한마디 덧붙였다. “이게 다 대통령을 잘 뽑아서 그래.” 더운 여름날, 오가며 봤던 최저임금 1만 원 피켓을 들었던 사람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꼭 대통령을 잘 뽑아서만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말하지 못했다.

어색하고 때론 무섭기만 했던 동료들과도 점점 친해졌다. 동료들이 한 달 반 넘게 버틴 나를 이곳의 구성원으로 점점 인정해주는 것 같았다. 할 수 있는 일이 점점 늘었고,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궁금해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피드백은 여전했지만, 심한 피드백을 받은 날에는 동료들이 내게 위로를 건넸다. “나도 여전히 누가 무섭다”라거나, “저도 힘들던 때가 있었다”고. 그런 동료들이 고마웠다. 유독 매장이 바빴던 날에 함께 근무한 동료들이 퇴근할 때면 “오늘 진짜 수고 많으셨다”는 말을 먼저 건넸다. 내 위치에서, 내가 건넬 수 있는 유일한 피드백이었다. 어떤 동료는 “그런 말해주는 사람은 벨 밖에 없다”며 고맙다고 했다. 나는 동료들의 사는 이야기를 듣는 게 즐거웠다. 동료들은 벨이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공감을 잘해줘서 좋다고 했다. 앞으로 여기서 오래 일할 수 있겠다 싶었다.

들쭉날쭉한 스케줄이 알바에게 미치는 영향

그러던 중 매장이 점점 바빠졌다. 오래 일했던 파트너가 그만뒀다. 직장인들의 여름휴가 시즌이 끝났고, 공영방송을 지키기 위한 방송국 사람들의 파업이 있었다. 국회에서는 국정감사가 시작되었다. 하루 다섯 시간을 일하는 날이 거의 없었다. 보통 기본적으로 한 시간에서 두 시간 연장근무가 들어갔다. 주 2회의 휴무가 보장되어야 했지만, 2주 연속 하루만 쉬고 일을 하기도 했다. 쉬지 못한 만큼 휴무일 근무로 일한 시간 모두 1.5배의 수당을 받을 수 있었지만, 몸이 축나기 시작했다. 점점 더 어려운 일을 배워서 해야 했기에 노동 강도도 세질 수밖에 없었다.

스케줄은 전주 수요일까지 공지되어야 했지만, 어떤 때는 토요일에나 나오기도 했고, 주중에 스케줄이 바뀌는 일도 잦았다. 매장이 너무 바빠 예정된 스케줄보다 더 일하기도 했고, 일찍 출근해줄 수 있냐는 전화를 받고 일하러 가는 날도 있었다. 같은 미들 근무라 해도 오늘과 내일 출근시간은 다르다. 예를 들어 오늘은 11시에서 오후 4시 30분이라면 내일은 10시 30분에서 오후 6시, 모레는 12시에서 오후 5시 30분. 그래서 출근시간을 항상 잘 체크해야 한다. 최소한의 인원으로 매장이 운영되기 때문에 한 사람이 제대로 출근을 못하면 다른 동료들이 힘들어진다. 차라리 한 주에 다 미들만 있으면 불만을 가지진 않았을 것이다. 한 주에 오픈부터 미들, 마감까지 다 있는 날도 있었다. 월, 화, 수는 7시나 7시 30분에 출근하고 목, 금은 11시 30분에, 토요일은 오후 6시에 출근하는 식이다. 마감근무를 마치고 밤 11시 30분에 퇴근해서 다음날 10시나 11시에 출근하는 날도 많았다. 운 좋게도 나는 ‘마오(오늘 마감근무하고 내일 오픈하는 근무를 말함. 즉, 밤 11시 30분 퇴근하고 아침 6시 30분 출근)’는 안 해봤다. 밤 9시에 퇴근해서 다음날 아침 6시 30분이나 7시에 출근하는 다른 동료의 스케줄을 보긴 했다. 이건 엄격하게 마오는 아니다. 심지어 12시 출근, 밤 11시 30분 퇴근 스케줄도 봤다. 기본적으로 일하기로 한 시간 외에 1분이라도 더 일하면 연장수당을 받으니 월급날은 행복하다. 근데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적어도 나에겐 그랬다.

이렇게 일하면 일단 신체리듬이 깨진다. 그리고 불규칙한 스케줄은 근무시간 외 다른 삶을 제약한다. 다음 주 스케줄(월~일요일을 한 주로 본다)을 제때 안 알려주면, 나는 스케줄이 나올 때까지 다른 일을 계획할 수 없다. 사소하게는 병원에 가는 것부터, 친구와의 약속을 잡는 일까지. 물론 미리 일정을 빼야 한다면, 스케줄을 신청하는 달력에 메모를 남길 수 있다. ‘벨 OFF 신청’, ‘벨 마감 신청’ 이런 식으로. 그러면 스케줄을 짜는 동료가 다음 주 스케줄에 반영해준다. 그러나 자주 할 수는 없고, 휴가 또한 서로 돌아가면서 매장 운영에 지장이 되지 않는 방식으로 가야 한다. 나는 일하는 시간 외에 글도 써야 했고, 종종 다른 활동 때문에 회의나 미팅을 가져야 했는데 이 모든 일들을 계획하는 게 쉽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포기했다. 일하는 시간뿐만 아니라 나머지 시간도 매장에 묶였다. 일이 너무 힘들어서, 끝나고 마감을 앞둔 글이라도 써볼라치면 책상 앞에 앉아 두세 시간 멍 때렸다. 특히, 오픈 근무를 한 날에는 늦어도 두시에는 퇴근했지만, 아침과 점심 러시 두 번을 뛰고 나면 어떤 생각도 할 기력이 없다. 어느 순간부터 일이 내 삶의 중심이 되었다. 고작 하루에 5시간에서 7시간 일하는 알바인데 말이다. 일하러 가는 시간, 일하는 시간, 일하고 돌아와 지친 체력과 정신력을 회복하는 시간. 그러고 뭘 좀 해볼라치면 다음날 출근시간이 다가왔다. 차라리 돈이라고 많이 받았으면 좀 더 참을 수 있었을까. 근데 월급이 고약했다. 그렇게 일해 첫 달에 80만 원 조금 넘게 받았고, 연장 및 야간, 휴일근무가 많았던 달은 120만 원 정도 받았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그만둔다고 말했다. 써야할 글과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알바는 전문가일까?

동료들이 내가 그만둔다는 소식을 접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동료가 내게 질문을 했다. “벨, 여기 일하는 사람들 보면 어떤 생각 들어요?” 순간 뭐라 답해야 할지 머릿속이 하얘졌다. “생각해 본적 없는데…”라고 말문을 열며 “솔직히 쉬운 일이라고 생각해본 적 없고, 그래서 여기서 오래 일하는 사람들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그날 낮, 매장에 그 동료의 대학동기인지 선배인지가 왔는데, 그 사람이 자길 보더니 “너 여기서 뭐해?”라고 했고, 그 말에 마음이 상한 눈치였다. ‘너 여기서 일해?’와 ‘너 여기서 뭐해?’는 미묘하게 다른 말이니까. 그가 자신은 스무 살 때 개인 카페부터 시작해 프랜차이즈 카페까지 10년 동안 카페 일만 했는데, 이 정도면 이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냐고 했다. 맞다. 그는 전문가였다. 빠르고 정확하게 음료를 만들 줄 알았고, 매장 운영을 맡아서 하는 시간대 매니저였다. 나는 그에게 많은 것을 배웠고, 오래 일하는 동료들을 보며 프로의식 없이는 이 일을 오래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카페에서 일하면 다 알바고, 알바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함부로 대하고, 한편으로는 지나친 서비스를 요구하기도 한다. 본사에 직접 고용된 우리들은 일하는 매장은 다르지만, 본사의 방침에 따라 최고의 음료와 서비스를 일선에서 제공하는 직원들이었다. 손님들을 맞고, 커피를 만들고, 매장을 관리하고 운영한다. 이런 사람들을 우리는 ‘바리스타’라고 한다. 그렇다, 우리는 바리스타다.

부치지 못한 편지

절대 올 것 같지 않은 마지막 출근 날이 왔다. 4개월 동안 일한 시간 중 가장 바쁜 날이었다. 아침부터 마치 손님들이 미리 약속이나 한 듯 물밀 듯이 밀려왔고, 점심때도 마찬가지였다. 마지막 근무라는 아쉬운 감정이 생길 겨를도 없이 정신없이 일했다. 바쁘면 시간이 잘 가는데 그날따라 시간도 잘 안 갔다. 오전 7시 반에 출근해 3시에야 퇴근했다. 유니폼, 모자, 앞치마를 잘 정리해 종이가방에 담아 휴게실에 올려뒀다. 그동안 감사했다는 짧은 메모와 함께. 일하고 있는 동료들과 짧은 인사를 나눴다. ‘전문가’ 동료와 눈이 마주쳤다. 갑자기 눈가가 뜨거워졌다. 서로 낯가리느라 늦게 친해진 만큼, 아쉬움도 컸다. 나를 참 살뜰히 챙겨준 그녀였다. 때로는 내 실수를 눈감아 주기도 했고, 둘만의 비밀을 공유하기도 했다. 놀러오겠다며, 꼭 밥 한번 먹자는 말을 남기며 나는 퇴사했다.

이 모든 이야기는 매장을 찾는 손님들은 알지 못하는, 아니 알 필요도 없는 나의 속사정이다. 가끔 지나친 요구를 하거나, 심한 컴플레인을 하는 손님을 볼 때면 화가 나면서도, 손님을 붙잡고 내가,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힘들게 일하는지 설명하고 싶을 때가 있었다. 그래서 썼다. 그 손님들을 더 이상 만날 수 없지만 말이다. 마치 부치지 못한 편지처럼.

***한국비정규노동센터가 주최한 ‘2017 비정규노동 수기 공모전’ 수상작을 인터넷 연재합니다. 이 글은 우수상을 받은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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