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11.24 18:18
수정 : 2005.11.24 18:18
왜냐면
선진국들이 지난 수십년에 걸친 경험을 보면 민간 의료보험의 확대는 심각한 사회적 불평등과 비효율, 서민가계에 파탄을 불렀다. 이 때문에 거의 모든 선진국들이 철저하게 공보험 중심으로 운영하고 있다.
최근 재정경제부를 중심으로 우리나라의 의료보장 제도를 공보험인 건강보험과 민간 의료보험으로 이원화하는 방안이 추진되고 있다고 한다. 경제부처는 오래전부터 민간 생명·손해보험사의 대변자로서 끊임없이 공보험의 근간을 흔들어오다 이제는 노골적으로 본심을 드러내고 있다. 정부내 민간의료보험의 진원지로 알려진 국무총리실 산하 의료산업선진화위원회는 설립 당시에 이미 시민사회단체로부터 참여를 거부당했으며, 고위 관료와 병원장 중심으로 구성되어 국민의 참여는 없고 이익단체의 참여만 있는 조직이다. 그런데 이 위원회에서 국가 의료제도의 기본 틀을 흔드는 무책임한 정책을 아무런 검증도 없이 내놓는 것을 보면 총리실의 위상이 대기업 홍보창구로 전락한 느낌이다.
재경부 장관이 말하는 이른바 “의료 분야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하다”는 것은 선진국에서 이미 오래전에 경험하여 실패한 패러다임이며, “현재의 재정만으로는 급증하는 의료 분야의 고급 의료수요를 감당할 수 없다”는 발언은 현재의 재정으로는 기본적인 의료수요도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발언으로 수정되어야 한다. 그러니 재정을 확충하여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의료부터 건강보험에서 보장하여, 일반 국민이 치료비 때문에 집을 팔아야 하는 비극적인 사태부터 해결해야 할 것이다. 그런 다음 민간보험을 허용해도 늦지 않다.
민간 의료보험을 뒷받침할 수 있는 경험적 증거는 사실 없다. 오히려 그 반대의 증거들이 무수히 많다. 우리나라보다 먼저 의료보험 제도를 발전시킨 선진국의 지난 수십년에 걸친 경험을 보면 민간 의료보험의 확대는 심각한 사회적 불평등과 비효율, 서민가계의 파탄을 가져왔으며, 이 때문에 거의 모든 선진국들이 철저하게 공보험 중심으로 운영하고 있고 이러한 정책기조는 정권이 바뀌어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민간 의료보험은 공보험의 보장성이 대략 80% 정도 되는 나라에서 아주 제한적으로 허용되고 있으나, 우리나라는 공보험의 보장성이 아직 50% 수준을 조금 웃돌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재경부는 이 사실을 은폐한 채, 민간 의료보험의 비중만을 거론하며 국민을 호도하고 있는 것이다. 신용카드 정보와 개인의 질병 정보를 같은 차원에서 인식하는 재경부의 태도 역시 매우 위험하다. 민간기업의 이익을 위해 국민의 사생활을 마음대로 침해해도 된다는 발상은 반인권적이며, 도대체 제정신을 가진 정부인지 국민적 분노를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에서 민간 의료보험이 의료비에서 자치하는 비중은 평균 6% 수준이고, 미국이나 네덜란드, 독일 등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나라가 4% 미만이다. 그것도 공공보험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지 못하도록 공보험의 본인 부담을 민간보험 상품에서 금지하는 등 엄격하게 규제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건강보험 제도는 아직 완성된 체계가 아니기 때문에 이 시점에서 어떻게 방향을 잡는지가 매우 중요하다. 건강보험의 보장성이 낮은 상태에서 일단 민간보험이 시장을 장악하게 되면, 시장의 유지를 위해 건강보험의 확대를 저지할 것이고, 그러면 국민은 더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한다. 시장논리에 의해 의료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면 우리나라보다 먼저 의료제도를 수립한 수많은 선진국들이 벌써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런데 선진국들이 지난 수십년 동안 다양한 제도를 경험해본 결과, 공보험 중심의 제도를 고집스럽게 유지하고 있는 이유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정부는 바람직한 의료보험 제도의 청사진을 먼저 그려놓고 일관되게 정책을 추진해야 할 것이고, 국민은 정부 정책에 대해 끊임없이 견제와 감시를 하고, 지지와 격려를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김진현/인제대 보건행정학부 교수·경실련 보건의료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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