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대문구 성산로 옥탑 집주인 할머니가 잠깐 보자고 하신다. 올 것이 왔구나. 그동안 집을 나설 때면 복도의 인기척을 살피거나, 앞서가는 주인 할머니가 보일 때면 느린 보폭으로 간격을 넓혀왔던 나의 각고의 노력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나는 옥탑방에 산다. 호마다 주인이 다른 ‘다세대 주택’과는 달리 소유주가 한 명인 ‘다가구 주택’이다. 건물주가 몇 가구를 임대하든 1인 1주택의 세금만 내면 되는, 임대업자에게 유리한 주택이다. 다만 3층 이하 건물에만 해당되므로, 그 위에 세워진 옥탑방은 불법 증축물이 된다. 나는 민원이 들어오면 즉시 철거해야 하는 비운의 방에 살고 있다. 역시나, 할머니는 월세를 올려 받으시려 하는 것 같았다. 나는 형편이 좋지 않고, 앞으로 더 나아질 기미도 없지만, 월세를 올려드려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할머니가 느닷없이 눈물을 흘리셨다. 지하방이 몇 달째 나가지 않고, 건물 관리하기도 너무 힘들다는 것이다.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목구멍까지 올라온 월세를 올려드리겠다는 말은 침과 함께 삼켰고, 머릿속은 눈물의 의미를 찾으려고 빠른 속도로 회전했다. 나는 공감에 가까운 괴상한 표정을 지어내는 데는 성공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 상황에서 울어야 할 건 역시 할머니가 아니라 나였다. 월세를 올려달라고 말하는 일, 집을 부동산에 내놓는 일, 관리비를 재촉하는 일, 현관 비밀번호를 바꾸는 일, 술을 싫어하신다며 옥탑에서 술 마시지 말라고 말하던 일까지 이 모든 게 할머니한테는 일이자 노동이었던 걸까. 매달 집 일곱 채의 임대수익을 올리고 있는 임대인이 겪는 노동의 고통과 강도를 고작 불법 증축물에 사는 세입자가 알 리가 없었다. 나는 할머니께 아무래도 방을 빼는 게 좋겠다고 말씀드렸다. 11월9일, 서울 서촌의 궁중족발 임차인 손가락 네 개가 찢어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건물을 매입한 새 임대인이 보증금 3000만원에 월 300만원이던 월세를 보증금 1억에 월세 1200만원으로 올렸고, 법원은 새 건물주의 손을 들어줬다. 시대가 변하고 정권이 바뀌어도 여전히 아침드라마의 클리셰 같은 이 스토리는, “우린 사실 남매 사이야”라는 고백처럼 매번 놀랍다. 강제집행 명령이 떨어지고 새 임대인은 용역을 고용했다. 집행관은 민간인에게 손을 대서는 안 되기 때문에 용역이 나서서 사람들을 끌어냈고, 이 과정에서 사람이 크게 다치는 일이 벌어졌다. 아마 용역회사는 상해에 대한 약간의 벌금을 내고 끝이 날 것이다. 합법을 위해 불법을 사실상 사주하고 합법을 이끌어내는 이 변증법적 작태에 아마 헤겔도 혀를 내두를 듯싶다. 이번 이야기의 새로운 반전이 있다면 새 임대인이 에스엔에스(SNS·사회관계망서비스)에서 보인 태도다. 그는 임차인을 보호하고 강제집행을 반대하는 이들을 “이 사회의 기본 약속을 어기고 법과 질서를 파괴하는 데모 참가자”라고 했다. 또 “부당한 폭력은 최강으로 대항한다”, “이번 명도까지 험난한 여정에서 빨갱이를 보았다. 무능한 정부를 보았다. 헬조선 맞네” 등의 글을 남겼다. ‘부당한 폭력', ‘무능한 정부', ‘헬조선'은 분명 억압된 소수의 강자를 향한 외침이 아니었던가.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월세를 갑자기 네 배나 올려 받고 싶어 하는 건물주가 할 말은 아니었다. “손가락 절단! 쌩양아치들의 자해소동으로 의심된다.” 그는 또 화룡점정의 어록을 남긴다. 노동이 소외를 일으키는 이유는 인간의 노동이 생존과 욕망을 충족하는 행위가 아닌 기계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이다. 노동은 이제 자기실현이 아니다. 결과물의 가치는 자본가에게 흘러가고, 노동자는 생산 목표의 톱니바퀴 속에서 차츰 마모되고 부식되어간다. 따라서 현대사회에서는 소외를 논하지 않고 노동을 논할 수 없다. 할머니가 눈물을 흘리면서까지 토로했던 것은 노동이었을까. 궁중족발 임대인의 명도 소송과 용역을 고용하기 위해 들인 수고는 노동이었을까. 그들의 수고는 소외가 없다. 건물의 생존은 자기 자신의 생존이고 건물의 욕망이 자기 자신의 욕망이다. 그들이 건물로 생산해낸 결과물은 고스란히 그들의 배를 불린다. 그러므로 건물주의 일은 노동이 아니다. 이들이 ‘폭력’, ‘헬조선’, ‘사회의 기본 약속’ 등 노동 소외층의 언어를 가져다 쓰는 건, 자신을 정당화할 적당한 언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18세기 영국의 혁명이론가 토머스 페인은 토지를 ‘조물주가 인류 전체에게 무상으로 준 선물’이라고 말했다. 인류가 있기 전부터 존재했기에, 땅은 원래 그 누구의 것도 아니었다. 분명 누군가가 금을 긋고 깃발을 꽂아, 마치 처음부터 자기 것인 양 사고팔았을 테다. 토지 소유의 뿌리는 무단 점거인 셈이다. 그래서 토머스 페인은 토지에 대한 법적 소유권은 토지 그 자체가 아니라 토지를 개량하거나 경작한 부분에만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토지 소유자는 토지를 이용한 대가를 사회에 지급할 의무가 생긴다. 그러니 우리는 모두 지구의 임대인이다. 이 임대료야말로 공공재인 토지 위에 세운 건물로 이익을 얻는 건물주한테 받아내야 할 마땅한 우리의 권리다. 그렇게 페인의 이론에 따르면, 나는 할머니께 방을 빼겠다는 말 대신 이렇게 말할 수도 있었겠다. “다음달부터는 토지 사용료를 올려 받아야 할 것 같아요.” 그 이론에 따라 궁중족발의 대표도 건물주에게 이렇게 말할 수도 있었겠다. “그 건물 가지고 땅에서 나가줄래?”
왜냐면 |
[왜냐면] 오늘날 임대인의 고충 / 이호석 |
이호석
서울 서대문구 성산로 옥탑 집주인 할머니가 잠깐 보자고 하신다. 올 것이 왔구나. 그동안 집을 나설 때면 복도의 인기척을 살피거나, 앞서가는 주인 할머니가 보일 때면 느린 보폭으로 간격을 넓혀왔던 나의 각고의 노력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나는 옥탑방에 산다. 호마다 주인이 다른 ‘다세대 주택’과는 달리 소유주가 한 명인 ‘다가구 주택’이다. 건물주가 몇 가구를 임대하든 1인 1주택의 세금만 내면 되는, 임대업자에게 유리한 주택이다. 다만 3층 이하 건물에만 해당되므로, 그 위에 세워진 옥탑방은 불법 증축물이 된다. 나는 민원이 들어오면 즉시 철거해야 하는 비운의 방에 살고 있다. 역시나, 할머니는 월세를 올려 받으시려 하는 것 같았다. 나는 형편이 좋지 않고, 앞으로 더 나아질 기미도 없지만, 월세를 올려드려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할머니가 느닷없이 눈물을 흘리셨다. 지하방이 몇 달째 나가지 않고, 건물 관리하기도 너무 힘들다는 것이다.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목구멍까지 올라온 월세를 올려드리겠다는 말은 침과 함께 삼켰고, 머릿속은 눈물의 의미를 찾으려고 빠른 속도로 회전했다. 나는 공감에 가까운 괴상한 표정을 지어내는 데는 성공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 상황에서 울어야 할 건 역시 할머니가 아니라 나였다. 월세를 올려달라고 말하는 일, 집을 부동산에 내놓는 일, 관리비를 재촉하는 일, 현관 비밀번호를 바꾸는 일, 술을 싫어하신다며 옥탑에서 술 마시지 말라고 말하던 일까지 이 모든 게 할머니한테는 일이자 노동이었던 걸까. 매달 집 일곱 채의 임대수익을 올리고 있는 임대인이 겪는 노동의 고통과 강도를 고작 불법 증축물에 사는 세입자가 알 리가 없었다. 나는 할머니께 아무래도 방을 빼는 게 좋겠다고 말씀드렸다. 11월9일, 서울 서촌의 궁중족발 임차인 손가락 네 개가 찢어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건물을 매입한 새 임대인이 보증금 3000만원에 월 300만원이던 월세를 보증금 1억에 월세 1200만원으로 올렸고, 법원은 새 건물주의 손을 들어줬다. 시대가 변하고 정권이 바뀌어도 여전히 아침드라마의 클리셰 같은 이 스토리는, “우린 사실 남매 사이야”라는 고백처럼 매번 놀랍다. 강제집행 명령이 떨어지고 새 임대인은 용역을 고용했다. 집행관은 민간인에게 손을 대서는 안 되기 때문에 용역이 나서서 사람들을 끌어냈고, 이 과정에서 사람이 크게 다치는 일이 벌어졌다. 아마 용역회사는 상해에 대한 약간의 벌금을 내고 끝이 날 것이다. 합법을 위해 불법을 사실상 사주하고 합법을 이끌어내는 이 변증법적 작태에 아마 헤겔도 혀를 내두를 듯싶다. 이번 이야기의 새로운 반전이 있다면 새 임대인이 에스엔에스(SNS·사회관계망서비스)에서 보인 태도다. 그는 임차인을 보호하고 강제집행을 반대하는 이들을 “이 사회의 기본 약속을 어기고 법과 질서를 파괴하는 데모 참가자”라고 했다. 또 “부당한 폭력은 최강으로 대항한다”, “이번 명도까지 험난한 여정에서 빨갱이를 보았다. 무능한 정부를 보았다. 헬조선 맞네” 등의 글을 남겼다. ‘부당한 폭력', ‘무능한 정부', ‘헬조선'은 분명 억압된 소수의 강자를 향한 외침이 아니었던가.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월세를 갑자기 네 배나 올려 받고 싶어 하는 건물주가 할 말은 아니었다. “손가락 절단! 쌩양아치들의 자해소동으로 의심된다.” 그는 또 화룡점정의 어록을 남긴다. 노동이 소외를 일으키는 이유는 인간의 노동이 생존과 욕망을 충족하는 행위가 아닌 기계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이다. 노동은 이제 자기실현이 아니다. 결과물의 가치는 자본가에게 흘러가고, 노동자는 생산 목표의 톱니바퀴 속에서 차츰 마모되고 부식되어간다. 따라서 현대사회에서는 소외를 논하지 않고 노동을 논할 수 없다. 할머니가 눈물을 흘리면서까지 토로했던 것은 노동이었을까. 궁중족발 임대인의 명도 소송과 용역을 고용하기 위해 들인 수고는 노동이었을까. 그들의 수고는 소외가 없다. 건물의 생존은 자기 자신의 생존이고 건물의 욕망이 자기 자신의 욕망이다. 그들이 건물로 생산해낸 결과물은 고스란히 그들의 배를 불린다. 그러므로 건물주의 일은 노동이 아니다. 이들이 ‘폭력’, ‘헬조선’, ‘사회의 기본 약속’ 등 노동 소외층의 언어를 가져다 쓰는 건, 자신을 정당화할 적당한 언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18세기 영국의 혁명이론가 토머스 페인은 토지를 ‘조물주가 인류 전체에게 무상으로 준 선물’이라고 말했다. 인류가 있기 전부터 존재했기에, 땅은 원래 그 누구의 것도 아니었다. 분명 누군가가 금을 긋고 깃발을 꽂아, 마치 처음부터 자기 것인 양 사고팔았을 테다. 토지 소유의 뿌리는 무단 점거인 셈이다. 그래서 토머스 페인은 토지에 대한 법적 소유권은 토지 그 자체가 아니라 토지를 개량하거나 경작한 부분에만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토지 소유자는 토지를 이용한 대가를 사회에 지급할 의무가 생긴다. 그러니 우리는 모두 지구의 임대인이다. 이 임대료야말로 공공재인 토지 위에 세운 건물로 이익을 얻는 건물주한테 받아내야 할 마땅한 우리의 권리다. 그렇게 페인의 이론에 따르면, 나는 할머니께 방을 빼겠다는 말 대신 이렇게 말할 수도 있었겠다. “다음달부터는 토지 사용료를 올려 받아야 할 것 같아요.” 그 이론에 따라 궁중족발의 대표도 건물주에게 이렇게 말할 수도 있었겠다. “그 건물 가지고 땅에서 나가줄래?”
서울 서대문구 성산로 옥탑 집주인 할머니가 잠깐 보자고 하신다. 올 것이 왔구나. 그동안 집을 나설 때면 복도의 인기척을 살피거나, 앞서가는 주인 할머니가 보일 때면 느린 보폭으로 간격을 넓혀왔던 나의 각고의 노력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나는 옥탑방에 산다. 호마다 주인이 다른 ‘다세대 주택’과는 달리 소유주가 한 명인 ‘다가구 주택’이다. 건물주가 몇 가구를 임대하든 1인 1주택의 세금만 내면 되는, 임대업자에게 유리한 주택이다. 다만 3층 이하 건물에만 해당되므로, 그 위에 세워진 옥탑방은 불법 증축물이 된다. 나는 민원이 들어오면 즉시 철거해야 하는 비운의 방에 살고 있다. 역시나, 할머니는 월세를 올려 받으시려 하는 것 같았다. 나는 형편이 좋지 않고, 앞으로 더 나아질 기미도 없지만, 월세를 올려드려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할머니가 느닷없이 눈물을 흘리셨다. 지하방이 몇 달째 나가지 않고, 건물 관리하기도 너무 힘들다는 것이다.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목구멍까지 올라온 월세를 올려드리겠다는 말은 침과 함께 삼켰고, 머릿속은 눈물의 의미를 찾으려고 빠른 속도로 회전했다. 나는 공감에 가까운 괴상한 표정을 지어내는 데는 성공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 상황에서 울어야 할 건 역시 할머니가 아니라 나였다. 월세를 올려달라고 말하는 일, 집을 부동산에 내놓는 일, 관리비를 재촉하는 일, 현관 비밀번호를 바꾸는 일, 술을 싫어하신다며 옥탑에서 술 마시지 말라고 말하던 일까지 이 모든 게 할머니한테는 일이자 노동이었던 걸까. 매달 집 일곱 채의 임대수익을 올리고 있는 임대인이 겪는 노동의 고통과 강도를 고작 불법 증축물에 사는 세입자가 알 리가 없었다. 나는 할머니께 아무래도 방을 빼는 게 좋겠다고 말씀드렸다. 11월9일, 서울 서촌의 궁중족발 임차인 손가락 네 개가 찢어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건물을 매입한 새 임대인이 보증금 3000만원에 월 300만원이던 월세를 보증금 1억에 월세 1200만원으로 올렸고, 법원은 새 건물주의 손을 들어줬다. 시대가 변하고 정권이 바뀌어도 여전히 아침드라마의 클리셰 같은 이 스토리는, “우린 사실 남매 사이야”라는 고백처럼 매번 놀랍다. 강제집행 명령이 떨어지고 새 임대인은 용역을 고용했다. 집행관은 민간인에게 손을 대서는 안 되기 때문에 용역이 나서서 사람들을 끌어냈고, 이 과정에서 사람이 크게 다치는 일이 벌어졌다. 아마 용역회사는 상해에 대한 약간의 벌금을 내고 끝이 날 것이다. 합법을 위해 불법을 사실상 사주하고 합법을 이끌어내는 이 변증법적 작태에 아마 헤겔도 혀를 내두를 듯싶다. 이번 이야기의 새로운 반전이 있다면 새 임대인이 에스엔에스(SNS·사회관계망서비스)에서 보인 태도다. 그는 임차인을 보호하고 강제집행을 반대하는 이들을 “이 사회의 기본 약속을 어기고 법과 질서를 파괴하는 데모 참가자”라고 했다. 또 “부당한 폭력은 최강으로 대항한다”, “이번 명도까지 험난한 여정에서 빨갱이를 보았다. 무능한 정부를 보았다. 헬조선 맞네” 등의 글을 남겼다. ‘부당한 폭력', ‘무능한 정부', ‘헬조선'은 분명 억압된 소수의 강자를 향한 외침이 아니었던가.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월세를 갑자기 네 배나 올려 받고 싶어 하는 건물주가 할 말은 아니었다. “손가락 절단! 쌩양아치들의 자해소동으로 의심된다.” 그는 또 화룡점정의 어록을 남긴다. 노동이 소외를 일으키는 이유는 인간의 노동이 생존과 욕망을 충족하는 행위가 아닌 기계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이다. 노동은 이제 자기실현이 아니다. 결과물의 가치는 자본가에게 흘러가고, 노동자는 생산 목표의 톱니바퀴 속에서 차츰 마모되고 부식되어간다. 따라서 현대사회에서는 소외를 논하지 않고 노동을 논할 수 없다. 할머니가 눈물을 흘리면서까지 토로했던 것은 노동이었을까. 궁중족발 임대인의 명도 소송과 용역을 고용하기 위해 들인 수고는 노동이었을까. 그들의 수고는 소외가 없다. 건물의 생존은 자기 자신의 생존이고 건물의 욕망이 자기 자신의 욕망이다. 그들이 건물로 생산해낸 결과물은 고스란히 그들의 배를 불린다. 그러므로 건물주의 일은 노동이 아니다. 이들이 ‘폭력’, ‘헬조선’, ‘사회의 기본 약속’ 등 노동 소외층의 언어를 가져다 쓰는 건, 자신을 정당화할 적당한 언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18세기 영국의 혁명이론가 토머스 페인은 토지를 ‘조물주가 인류 전체에게 무상으로 준 선물’이라고 말했다. 인류가 있기 전부터 존재했기에, 땅은 원래 그 누구의 것도 아니었다. 분명 누군가가 금을 긋고 깃발을 꽂아, 마치 처음부터 자기 것인 양 사고팔았을 테다. 토지 소유의 뿌리는 무단 점거인 셈이다. 그래서 토머스 페인은 토지에 대한 법적 소유권은 토지 그 자체가 아니라 토지를 개량하거나 경작한 부분에만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토지 소유자는 토지를 이용한 대가를 사회에 지급할 의무가 생긴다. 그러니 우리는 모두 지구의 임대인이다. 이 임대료야말로 공공재인 토지 위에 세운 건물로 이익을 얻는 건물주한테 받아내야 할 마땅한 우리의 권리다. 그렇게 페인의 이론에 따르면, 나는 할머니께 방을 빼겠다는 말 대신 이렇게 말할 수도 있었겠다. “다음달부터는 토지 사용료를 올려 받아야 할 것 같아요.” 그 이론에 따라 궁중족발의 대표도 건물주에게 이렇게 말할 수도 있었겠다. “그 건물 가지고 땅에서 나가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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