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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11.20 18:23 수정 : 2017.11.21 15:16

한민수

교사·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동천로

먼저 20세기 후반의 이야기를 조금 해보렵니다. 교무실 한구석, 저는 어머니와 함께 고3 담임선생님 앞에 떨면서 앉아 있었습니다. “재수를 안 하려면 여기에 원서를 써야 한다”는 선생님의 말과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어머니를 원망하며 저는 끝내 “조금 위험하지만 가고 싶은 곳이 따로 있는데요”라는 말을 끝내 꺼내지 못했습니다.

21세기가 시작되고 저는 교사가 되었고, 고3 담임을 여섯 번 하게 됐습니다. 농어촌 학교에서 4년, 새도시의 신설학교 1, 2회 입학생을 맡아 원서를 쓰고 대학을 보냈지요. 생활기록부와 교사 추천서를 열심히 쓰고, 자기소개서와 논술, 면접 지도를 하면서 수시란 것이 생겨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착하고 성실한 아이들, 호기심 많고 사회에 기여하고 싶다는 진심을 가진 아이들이 수시로 대학을 가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 작은 보람이었습니다. 합격 소식을 전하러 교실로 뛰어가던 기억, 어려운 가정 형편에서도 항상 친구를 도우며 봉사활동도 열심히 하던 아이가 좋아서 방방 뛰며 흘리던 눈물을 잊을 수 없습니다.

학력고사라는 국가가 주는 전·후기 단 두 번의 기회 때문에 주눅 들어 꼼짝하지 못했던 저의 고등학교 시절에 비하면 아이들에게는 여러 번의 기회가 있었고, 몇 과목 시험에 실패해도 패자 부활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보수 언론을 중심으로 ‘학생부종합전형은 썩었다. 수능이 가장 공평하다'는 기사가 늘어나더니, 기사의 댓글이나 설문조사 결과를 봐도 ‘정시 비중을 늘려야 한다'는 의견이 앞서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수능 전날,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수시 비중이 대폭 줄고, 정시 비중이 늘어난다면 어떻게 될까요? 저는 공포영화의 한 장면처럼 너무 무섭습니다. 포항의 대피소에서 수능 공부를 하고 있는 한 학생의 사진을 볼 때, 처음에는 슬펐고 점점 무서워졌습니다. 학력고사는 대개 전기, 후기 두 번의 기회가 있었지만, 수능은 단 한 번으로 스무 살까지 모든 공부와 학교생활이 평가되고, 수십만 학생들을 한 줄로 쭉 세웁니다. 수능 날, 몸이 아프면 그것도 관리를 하지 못한 본인의 잘못이라고 자책할 우리 아이들이 안쓰럽습니다.

학생부종합전형의 사교육 영향은 분명 차단해야 할 문제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점은 최상위권 대학의 몇 개 전형에 집중되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대부분 대학의 수시 전형은, 학교에서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배우고 활동하면서 성장한 아이들이 합격의 기쁨을 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수시 때문에 수업도 학생 중심의 토론, 토의, 탐구 수업으로 바뀔 수 있었고, 학생들이 교과서 외의 책도 읽고 봉사와 체험활동도 하면서 자신만의 성공이 아닌 진정으로 보람 있는 삶이 무엇인가를 고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1주일 연기된 수능 때문에 버려진 참고서를 다시 줍는 아이들의 사진을 보면서, 이 순간에 참 외로웠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혼자 책을 보고, 학원에 가고, 옆의 아이들을 경쟁자로 생각하며, 학원 강사와 학교 교사의 구분이 없어지는 그런 학교는 정말 싫습니다. 이번 지진을 계기로 수능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필요합니다. 단기적으로는 절대평가 확대와 9등급제의 완화를, 장기적으로는 자격고사로 바꾸고 문제은행식으로 여러 번 응시하게 하는 등의 논의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모든 아이들의 10대가 공포영화가 아니라 따뜻한 성장영화로 기억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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