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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11.13 17:54 수정 : 2017.11.13 19:02

권근술
한겨레신문사 전 대표이사, 어린이어깨동무 전 이사장, <동아일보> 10기 수습기자

오늘 우리들은 한편으로는 울고픈 마음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일흔을 훌쩍 넘은 노인네다운 헛웃음으로, 착잡하기 짝이 없는 심정으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실은 일흔 중반에 이른 노구가, 일생이 어긋난 분노의 떨림을 온몸으로 느낍니다.

우리는 50년 전, 당시 20대다운 청운의 꿈을 안고 동아일보사에 합격한 공채 수습 10기들입니다. 우리는 50년 전인 1967년 11월16일, 22명에 대한 사령장을 받았고, 1975년 전후해서 전원이 언론의 자유를 외치다 쫓겨났습니다. 그새 동기 두 명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언론사가 언론의 자유를 외친 사원들을 몰아내는 것은 소가 웃을 일이 아닙니까? 우리 10기는 동아일보사 3, 4층 편집국과 방송국에서 기자, 피디(PD), 아나운서 등 100여명의 동료와 함께 철야 농성을, 2층 공무국에서는 23명의 기자들이 단식 농성을 닷새째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농성은 자유언론 운동이 거꾸로 가는 듯한 이상한 조짐을 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유신정권에 굴복한 동아일보사 경영진이 산소용접기, 해머, 각목으로 중무장한 술 취한 폭력배를 동원하여 자유언론을 지키기 위해 농성 중인 사원 150여명을 차가운 거리로 내동댕이친 것은 유신 치하의 1975년 3월17일 새벽이었습니다. 폭도들은 농성 사원들에게 침을 뱉고 발길질을 해대며 언론사로서는 차마 할 수 없는 끔찍한 모욕을 주었습니다. 그해 3월 새벽은 차가웠습니다. 통금으로 인적이 끊긴 광화문 거리는 괴괴했습니다. 재야 민주인사들과 국내외 취재기자들이 동아일보사 기자들의 안위를 걱정해서 사옥 앞에 진을 치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정보기관원들은 길 건너편 파출소에서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입사한 지 7년4개월 즈음의 일입니다.

이때 우리 10기는 17명(2명은 조기 퇴사)이 쫓겨났고 회사에 남아 있던 3명은 1980년 신군부 세력이 자행한 대량 숙청자 명단에 포함되어 우리 동기생은 20명 전원이 해직의 비운을 맞게 된 것입니다. 언론사가 언론의 자유를 지키려고 애쓴 농성 사원들을 언론 현장에서 ‘학살’한 것은 세계 언론사를 통틀어 전무후무할 것입니다.

우리 10기는 자유언론 운동의 자랑스러운 일익이었습니다. 또한 1974년 독재정권을 긴장시켰던 우리나라 최초의 언론노조 운동의 주축이었습니다. 그 결과 동아일보 10기 전원이 자유언론 실천 과정에서 해직을 당했고, 동아일보에서 폭력적으로 쫓겨난 이후 언론사 발행인을 무려 5명이나 배출했습니다. 과문한 탓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어느 회사에서 입사 이후 50년 동안 입사 동기가 결속을 유지해, 50주년 기념 행사를 하는 사례가 있었을까요? 그 원동력은 말할 필요도 없이 독재 권력이 끊임없이 고개를 들던 그 긴 세월의 좌절과 시련에도 가시지 않는 자유언론에의 타는 목마름이었습니다.

자유언론 운동이 촉발된 계기는 참을 수 없는 언론인으로서의 자존감 상실, 유신체제와 정치상황에 대한 절망감, 광고 탄압의 본격화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이었습니다. 자유언론 운동이 태동한 1974년 말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등의 ‘격려 광고’가 기자들의 투쟁 의지를 북돋아 주었고 버팀목이 되어 주었습니다.

우리는 오늘도 이런 광고 문구를 선명히 기억합니다.

“동아일보, 너마저 배신하면 이민 갈 거야.―E여대생” “새로 태어날 아기의 자유를 위하여!―엄마 아빠”

격려 광고는 들불처럼 학생으로, 문인으로, 법조인으로, 회사원으로, 노동자로 끝없이 번져 나갔습니다. 사옥 현관에서부터 광고국 2층 복도를 가득 메운 격려 광고의 장사진 행렬을 우리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특히 버스 안내양들이 “휴일 비번 날에 <동아일보> 신문을 팔아 모은 돈으로 격려 광고를 내러 왔다”고 말하던 수줍던 미소를 잊지 못합니다. 격려 광고는 유신독재에 대한 국민적 저항, 촛불시위였습니다. 격려 광고나 ‘촛불혁명’은 국민을 외면한 정권에 대한 평화적인 저항이었다는 점에서 시민항쟁의 한 흐름을 이루고 있습니다.

또한 열화와 같은 국민의 성원이 없었던들, 그 고마움의 빚이 없었던들 동아일보에서 쫓겨난 당일 결성했던 ‘동아일보자유언론투쟁위원회’(이하 동아투위)가 50년 긴 인고의 세월을 버텨낸 것도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동아일보사도, 동아투위도 격려 광고를 내준 이들에게 정중하게 감사의 인사를 건넨 적이 없음을 오늘에야 우리는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동아투위는 40여년이 지난 지금도 월례회의 모임을 이어 가고 있습니다. 신문사 사옥 앞에 늘어서서 ‘도열 시위’도 했고 기자협회까지 ‘행진’도 했습니다. 유신하의 서울 한복판에서, 그것도 광화문 한가운데서 항의시위를 한 셈이었습니다. “부당해임 즉각 철회하라!” “이동욱 관선주필 파면하라!”고 외치고 또 외쳤습니다. 지나가던 버스 승객들은 격려의 손을 흔들기도 했습니다. 종로경찰서장 명의의 “다 잡아간다”는 연행 위협에도 그 다음날에는 오히려 더 많은 동아투위 위원들이 내복을 껴입고 도열 시위에 참가했습니다.

치열한 법정 싸움도 벌였습니다. 정부기관이나 다름없는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 청원을 넣어 정부와 동아일보사가 해직기자에게 사과와 배상을 하라는 권고도 받아냈습니다. 조선일보 80년 해직기자 동료와 손잡고 <한겨레>도 창간했습니다. 촛불의 힘으로 태어난 새 정부가 ‘사과와 배상’은 왜 미적대고 있는지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동아일보에 돌아가 단 한 달만이라도 동아일보사 책상 앞에 앉아 보는, 역사를 바로 세우는 정도(正道)는 열리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동아일보사에 돌아가는 것이야말로 동아투위의 명예가 아닌, 동아일보사의 명예가 된다는, 철없는 아이들도 아는 뻔한 이치를 왜 모르는지, 동아일보사는 막무가내일 뿐입니다. 가증스럽게도,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동아일보 사주가 배상금을 놓고 동아투위를 찔러보기도 했습니다. 다들 미행과 감시는 물론 가택연금, 연행, 구속, 투옥으로 고생을 직사하게 하고 가족들과 함께 천신만고 끝에 살아남았습니다. 우리들의 청운의 꿈은 너덜너덜 산산조각이 나 있었습니다.

지금 언론은 ‘기레기’가 상징하듯 만신창이가 됐습니다. 언론 자유, 권력 감시 등 언론의 본질은 온데간데없고 권력의 시녀가 되어 버린 언론 현실이 우리를 아프게 합니다. 우리의 젊은 꿈을 작살낸 중앙정보부, 그 후신인 지금의 국가정보원은 여전히 범죄의 소굴이었음이 드러나 단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한국방송(KBS), 문화방송(MBC)도 총파업 중입니다. 전 정권에서 비리를 저지른 사장더러 물러가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우리 10기들은 일흔 중반을 넘어서 있습니다.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저희에게 꿈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늙은이의 쉰 목소리로 대답할 겁니다.

“우리는 평생을 ‘해직기자’로 살았소. 제발, 앞으로는 ‘해직기자’라는 소리 좀 들리지 않는 세상이 오면 좋겠소.”

동아일보 공채수습 10기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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