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십정초등학교 특수교사 나는 16년 동안 초등학교에서 장애 학생들을 가르쳐온 특수교사다. 세상 누구보다 사랑스러운 내 학생들이 비장애 학생들과 같은 공간에서 같이 생활하며 똑같은 학교의 일원이 되도록 하는 게 나의 가장 큰 교육목표였다. 신규 교사 시절 장애인·비장애인 통합교육이 막 활성화가 되던 무렵, 비장애 학생들은 우리 반에 장애인 친구가 있으면 교실 분위기도 이상해지고 수업에 많은 방해가 돼 학업 능률이 떨어질 것이라고 걱정했다. 하지만 막상 장애인 친구와 같은 반을 해도 성적이 떨어지지 않고 오히려 장애인 친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선생님이나 주위의 따뜻한 시선을 느끼고는 장애인 친구와 같은 반이 되기를 희망하는 비장애인 학생들이 생겨났다. 지난해 가을 체육대회 때의 일이다. 자폐를 가진 창희(가명)는 덩치는 아주 커다랗지만 유순한 성격으로 아주 귀여운 학생이다. 덩치가 너무 커서 달리기를 못하기에 나는 출발신호가 울리면 뒤로 처지는 창희의 손을 잡아끌고라도 뛸 마음으로 초초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땅” 하는 출발신호에 창희는 영락없이 귀를 막고 서 있었고, 나는 이때다 하고 창희를 향해 달려가는데… 함께 출발하던 다른 세 아이가 약속이나 한 듯 멈추더니 출발하지 못한 창희의 손을 한쪽씩 나누어 잡고 그의 보폭에 맞추어 천천히 즐기면서 더없이 행복한 표정으로 뛰는 것이 아닌가. 장애인 친구와 함께 뛰는 아이들에게서는 이기고자 하는 욕심도, 경쟁도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결승선의 어머니들은 아름다운 네 명의 아이들에게 모두 똑같이 1등 도장을 찍어주셨다. 1등 도장을 똑같이 찍은 아이들이 손을 맞대고 찍은 사진을 보면 그때의 감동이 느껴지는 듯하다. 이 아이들이 자라 어른이 되는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서로가 행복한 세상이 되겠지 하는 희망에 부풀기도 했다. 하지만 한 장의 사진에 나는 다시 먹먹해졌다. 장애 학생을 자녀로 둔 부모들이 특수학교 설립을 바라며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꿇고, 이어 마을 주민들 역시 마주 보며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은 너무나 서글펐다. 아이들은 서로 배려하며 어울려 사는 법을 스스로 느끼고 배우는데, 아이들에게 보이는 어른들의 모습이 너무나 부끄러워, 뭐라 표현할 수가 없었다. 장애인에게 교육이 가지는 의미는 비장애인과 확연히 다르다. 비장애인은 더 나은 삶을 위해 배움을 택하지만, 장애인이 교육받는 모든 것은 생명과 연결된다. 제대로 먹고 싸는 능력부터 말하고 듣고 만지고 걷고 움직이는 능력까지, 장애를 가진 아이는 살아남기 위해 교육이라는 것을 받아야 한다. 생명줄 같은 교육이기에 장애 아이를 둔 학부모들은 순간의 자존심이나 수치심 따위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막말과 삿대질을 하는 사람들에게조차 무릎을 꿇고 빌 수 있었던 것이다. ‘제발, 제발, 제발…’을 간절하게 되뇌며. 모두가 행복을 누릴 권리가 있는 사람인데 왜 이렇게까지 되었을까. 모두가 함께 누리고, 그래서 더 많이 행복할 수 있는 길이 분명히 있는데. 초등학교 어린아이들도 알고 있는 그 길을, 깨닫지도 깨달으려고도 하지 않는 이 땅의 어른들을 보면서, 아이들이 가진 순수한 진심과 행복들이 지켜지지 못하고 사라질까 두려워진다.
왜냐면 |
[왜냐면] 장애와 비장애, 만나면 손잡고 달린다 / 문예진 |
문예진
인천십정초등학교 특수교사 나는 16년 동안 초등학교에서 장애 학생들을 가르쳐온 특수교사다. 세상 누구보다 사랑스러운 내 학생들이 비장애 학생들과 같은 공간에서 같이 생활하며 똑같은 학교의 일원이 되도록 하는 게 나의 가장 큰 교육목표였다. 신규 교사 시절 장애인·비장애인 통합교육이 막 활성화가 되던 무렵, 비장애 학생들은 우리 반에 장애인 친구가 있으면 교실 분위기도 이상해지고 수업에 많은 방해가 돼 학업 능률이 떨어질 것이라고 걱정했다. 하지만 막상 장애인 친구와 같은 반을 해도 성적이 떨어지지 않고 오히려 장애인 친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선생님이나 주위의 따뜻한 시선을 느끼고는 장애인 친구와 같은 반이 되기를 희망하는 비장애인 학생들이 생겨났다. 지난해 가을 체육대회 때의 일이다. 자폐를 가진 창희(가명)는 덩치는 아주 커다랗지만 유순한 성격으로 아주 귀여운 학생이다. 덩치가 너무 커서 달리기를 못하기에 나는 출발신호가 울리면 뒤로 처지는 창희의 손을 잡아끌고라도 뛸 마음으로 초초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땅” 하는 출발신호에 창희는 영락없이 귀를 막고 서 있었고, 나는 이때다 하고 창희를 향해 달려가는데… 함께 출발하던 다른 세 아이가 약속이나 한 듯 멈추더니 출발하지 못한 창희의 손을 한쪽씩 나누어 잡고 그의 보폭에 맞추어 천천히 즐기면서 더없이 행복한 표정으로 뛰는 것이 아닌가. 장애인 친구와 함께 뛰는 아이들에게서는 이기고자 하는 욕심도, 경쟁도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결승선의 어머니들은 아름다운 네 명의 아이들에게 모두 똑같이 1등 도장을 찍어주셨다. 1등 도장을 똑같이 찍은 아이들이 손을 맞대고 찍은 사진을 보면 그때의 감동이 느껴지는 듯하다. 이 아이들이 자라 어른이 되는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서로가 행복한 세상이 되겠지 하는 희망에 부풀기도 했다. 하지만 한 장의 사진에 나는 다시 먹먹해졌다. 장애 학생을 자녀로 둔 부모들이 특수학교 설립을 바라며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꿇고, 이어 마을 주민들 역시 마주 보며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은 너무나 서글펐다. 아이들은 서로 배려하며 어울려 사는 법을 스스로 느끼고 배우는데, 아이들에게 보이는 어른들의 모습이 너무나 부끄러워, 뭐라 표현할 수가 없었다. 장애인에게 교육이 가지는 의미는 비장애인과 확연히 다르다. 비장애인은 더 나은 삶을 위해 배움을 택하지만, 장애인이 교육받는 모든 것은 생명과 연결된다. 제대로 먹고 싸는 능력부터 말하고 듣고 만지고 걷고 움직이는 능력까지, 장애를 가진 아이는 살아남기 위해 교육이라는 것을 받아야 한다. 생명줄 같은 교육이기에 장애 아이를 둔 학부모들은 순간의 자존심이나 수치심 따위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막말과 삿대질을 하는 사람들에게조차 무릎을 꿇고 빌 수 있었던 것이다. ‘제발, 제발, 제발…’을 간절하게 되뇌며. 모두가 행복을 누릴 권리가 있는 사람인데 왜 이렇게까지 되었을까. 모두가 함께 누리고, 그래서 더 많이 행복할 수 있는 길이 분명히 있는데. 초등학교 어린아이들도 알고 있는 그 길을, 깨닫지도 깨달으려고도 하지 않는 이 땅의 어른들을 보면서, 아이들이 가진 순수한 진심과 행복들이 지켜지지 못하고 사라질까 두려워진다.
인천십정초등학교 특수교사 나는 16년 동안 초등학교에서 장애 학생들을 가르쳐온 특수교사다. 세상 누구보다 사랑스러운 내 학생들이 비장애 학생들과 같은 공간에서 같이 생활하며 똑같은 학교의 일원이 되도록 하는 게 나의 가장 큰 교육목표였다. 신규 교사 시절 장애인·비장애인 통합교육이 막 활성화가 되던 무렵, 비장애 학생들은 우리 반에 장애인 친구가 있으면 교실 분위기도 이상해지고 수업에 많은 방해가 돼 학업 능률이 떨어질 것이라고 걱정했다. 하지만 막상 장애인 친구와 같은 반을 해도 성적이 떨어지지 않고 오히려 장애인 친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선생님이나 주위의 따뜻한 시선을 느끼고는 장애인 친구와 같은 반이 되기를 희망하는 비장애인 학생들이 생겨났다. 지난해 가을 체육대회 때의 일이다. 자폐를 가진 창희(가명)는 덩치는 아주 커다랗지만 유순한 성격으로 아주 귀여운 학생이다. 덩치가 너무 커서 달리기를 못하기에 나는 출발신호가 울리면 뒤로 처지는 창희의 손을 잡아끌고라도 뛸 마음으로 초초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땅” 하는 출발신호에 창희는 영락없이 귀를 막고 서 있었고, 나는 이때다 하고 창희를 향해 달려가는데… 함께 출발하던 다른 세 아이가 약속이나 한 듯 멈추더니 출발하지 못한 창희의 손을 한쪽씩 나누어 잡고 그의 보폭에 맞추어 천천히 즐기면서 더없이 행복한 표정으로 뛰는 것이 아닌가. 장애인 친구와 함께 뛰는 아이들에게서는 이기고자 하는 욕심도, 경쟁도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결승선의 어머니들은 아름다운 네 명의 아이들에게 모두 똑같이 1등 도장을 찍어주셨다. 1등 도장을 똑같이 찍은 아이들이 손을 맞대고 찍은 사진을 보면 그때의 감동이 느껴지는 듯하다. 이 아이들이 자라 어른이 되는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서로가 행복한 세상이 되겠지 하는 희망에 부풀기도 했다. 하지만 한 장의 사진에 나는 다시 먹먹해졌다. 장애 학생을 자녀로 둔 부모들이 특수학교 설립을 바라며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꿇고, 이어 마을 주민들 역시 마주 보며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은 너무나 서글펐다. 아이들은 서로 배려하며 어울려 사는 법을 스스로 느끼고 배우는데, 아이들에게 보이는 어른들의 모습이 너무나 부끄러워, 뭐라 표현할 수가 없었다. 장애인에게 교육이 가지는 의미는 비장애인과 확연히 다르다. 비장애인은 더 나은 삶을 위해 배움을 택하지만, 장애인이 교육받는 모든 것은 생명과 연결된다. 제대로 먹고 싸는 능력부터 말하고 듣고 만지고 걷고 움직이는 능력까지, 장애를 가진 아이는 살아남기 위해 교육이라는 것을 받아야 한다. 생명줄 같은 교육이기에 장애 아이를 둔 학부모들은 순간의 자존심이나 수치심 따위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막말과 삿대질을 하는 사람들에게조차 무릎을 꿇고 빌 수 있었던 것이다. ‘제발, 제발, 제발…’을 간절하게 되뇌며. 모두가 행복을 누릴 권리가 있는 사람인데 왜 이렇게까지 되었을까. 모두가 함께 누리고, 그래서 더 많이 행복할 수 있는 길이 분명히 있는데. 초등학교 어린아이들도 알고 있는 그 길을, 깨닫지도 깨달으려고도 하지 않는 이 땅의 어른들을 보면서, 아이들이 가진 순수한 진심과 행복들이 지켜지지 못하고 사라질까 두려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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