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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8.28 19:24 수정 : 2017.08.28 19:40

전수경
노동건강연대 활동가

어떤 일들은 일어날 법해서 그 결과를 기다리는 일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게 된다. 어떤 일은 동시대에 일어나기에는 생경해서 도무지 적응이 안 된다. 연표에 어떤 착오가 있어서 잘못 배달된 사건 같다고 할까.

2017년 8월25일 오후 1시, 서울 서초동 법원 앞에는 도시의 모든 기자들이 모여 있었다. 한국 최대 기업의 상속자가 부패한 대통령과 주고받은 은밀한 거래에 대한 판결이 곧 발표될 터였다. 두 명 정도의 기자가 이 대열에서 빠져나와 경기도 지방 도시의 영안실로 향했다. 영안실에는 스물세살 청년의 영정이 걸려 있을 것이었다.

“죽고 오면 무슨 소용이죠? 아이가 누워 있는 열흘 동안 아무도 안 오더니 죽은 다음에 뭐 하러 찾아옵니까?” 청년의 어머니는 기자의 명함을 밀어냈다. 너무 일찍, 와서는 안 되는 죽음이 왔다. 소화기 제조 공장, 소화기에 가루를 채워넣는 일을 하던 청년은 일을 한 지 2주 만에 독성간염으로 사망하였다.

노동건강연대는 휴대폰 하청공장에서 메탄올 액체로 부품을 세척하다 시력을 잃은 6명의 20대 노동자와 지난해를 함께 보냈다. 모두 일한 지 5일에서 두 달 이내 시력을 잃었다. 메탄올 사건에서 정부는 ‘근로감독관과 전문가를 현장에 파견해 유해물질을 확인하고, 전면 작업 중지와 노동자들에 대한 임시건강진단을 명령했다’고 보도자료를 냈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나고 대통령이 바뀐 지금, 정부는 메탄올이 쓰여 있던 자리에 ‘HCFC-123’이라는 물질을 넣어 보도자료를 배포하고 있다. 그리고 슬그머니 끼워 넣은 한 문장이 있다. ‘불법파견 사실을 확인’했다는 것이다. 메탄올에서 그랬듯이 이번에도 ‘불법파견’을 대놓고 건너뛰려고 하는 걸까. 작업중지, 임시건강진단명령이라는 용어는, 부수적인 정리정돈 행위를 전문적이고 긴박한 대책인 것처럼 위장하고 있다.

비질 몇 번 해놓고는 청소 잘한 것처럼 보이게 하는 눈속임이다. 불법파견이 무엇인가. 인터넷에 넘치는 공장알바 후기가 불법파견노동의 수기들이다. 알바 사이트에서 포장업무, 초보환영이라 해서 갔더니 라인에 앉혀놓고 시간당 800개의 부품을 붙이게 했다는 웃픈 후기의 결말은, 속도가 느리다고 욕먹어가면서 조립하다가 5일 만에 도망쳐 나왔다는 것이다. 그 자리에는 다른 알바 청춘이 봉고차에 실려서 올 것이다. 메탄올 실명도 소화기 충전제 사망도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70년대, 80년대의 신문 사회면에서 볼 법한 중독, 실명, 사망이 21세기 청년들에게 번지고 있다. 어떤 일을 어떤 환경에서 하는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노동이다. 봉고차에 사람을 실어나르는 인력업체도, 사람을 쓰는 공장주도 그저 하루 알바, 스치는 일회용품으로 간주한다.

대기업 상속자의 감옥행은 변화의 시그널로 읽힌다. 그러나 스물세살 청년의 죽음은 구시대가 순순히 물러나지는 않을 것임을 보여준다. 청년 공장알바, 불법파견. 정부는 실태 파악부터 제대로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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