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기념재단 전 상임이사 5·18 민주화운동을 담은 영화 <택시운전사>가 1천만 관객을 돌파했다. 전두환의 회고록은 법원에 의해 5·18 민주화운동을 왜곡한 사실이 인정되어 출판과 배포가 금지되었으나 여전히 인터넷과 동네 서점에서 팔리거나 진열되고 있다. 그동안 5·18 가해자와 옹호자 쪽이 제기하는 5·18 논쟁은 왜곡 담론을 벗어나지 못한 채 반복되고 있지만, <택시운전사>에 쏠리는 대중의 폭발적 관심은 5·18에 대한 사회적 태도를 방증한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사법적 판결과 제도적 기념사업이 추진되었음에도 왜곡과 폄훼의 뭇매를 맞아온 5·18의 역사적 진실을 바로 세우라는 국민적 요구로 해석할 수 있다. 영화는 5·18 담론에 대해 하버마스의 지적처럼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논증이 이루어져 왔는지를 우리의 역사와 국민에게 묻고 있다. 동시에 영화에 대한 뜨거운 호응은 5·18에 대한 국민의 보편적 역사인식이 중대한 변곡점에 도달해 있음을 웅변하고 있다. 그간 5·18 담론은 해결 담론과 실천 담론의 형태로 전개되어 왔다. 우선 해결 담론은 비극적 사태 담론, 진상규명 담론, 명예회복 담론, 역사심판 담론, 적극적 처벌 담론, 명예회복 및 기념사업 담론 등의 단계를 거쳐왔다. 국제법적 지위를 가진 광주 문제 해결 5원칙 즉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명예회복, 적절한 배상, 기념사업 등의 각 단계마다 해결 방안을 놓고 갈등과 논쟁이 거듭됐다. 실천 담론은 역사규정 담론, 왜곡 담론, 인권 담론, 문화 담론 등으로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폭넓은 담론을 제공해 왔다. 그럼에도 전두환 등 신군부 쪽 인사들과 그 추종 세력들의 증언과 회고록 등은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역사적 의의는 물론 사건의 원인과 경과에 대해 철저하게 실체적 진실을 부인하는 데 앞장서 왔다. 가해자 쪽의 목표는 모든 논쟁을 왜곡 담론의 울타리 안에 가두어 진실 공방을 지속시키려는 일방통행식 주장의 반복이다. 여기에 동조 세력의 동원 담론이 가세하고 있다. 그들은 역사 정의 담론으로 민심의 이행을 막으려는 반이성적 행태를 보이고 있다. 결국 이들의 왜곡 담론은 구국의 결단이라는 그들의 쿠데타 행위마저 부정하는 오류에 빠지고 말았다. 북한군 특수부대 600여명이 광주학살 주범이라는 주장이 그것이다. 어디로 침투해서 어디로 퇴각했는지에 대한 탈북민들의 증언이 있지만 신뢰할 만한 수준은 아니다. 모두 몇 단계를 거쳐 들은 전언에 불과하다. 또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모두 죽었다고 한다. 일부는 국립5·18민주묘지의 무명열사 묘역에 잠들어 있다고 주장한다. 5명의 무명열사 가운데 6살 어린이도 있다. 만보를 양보해 이들이 침투했다면 광주 진압은 남북한 특수부대의 합작품이고 남한의 신군부는 이적행위, 반역행위를 통해 집권했다는 지적에 어떻게 답할 것인가. 5·18 기록물 대부분이 유네스코 세계 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세계의 5·18 민주화운동으로 자리매김되었어도 저들은 제2의 학살극을 멈추지 않고 있다. 전두환은 당시 행적에 대해 신군부 특히 5·18 진압군을 지휘할 위치에 있지 않았고 발포명령을 내린 바 없다고 일관되게 발뺌하고 있다. 전씨는 당시 보안사령관, 중앙정보부장 서리, 박정희 시해사건 합동수사본부장을 겸임하고 있었다. 2007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의 최종 보고서는 그 부록에서 전두환의 5·18 사건 처리와 관련한 지시 내용을 상세히 실었다. 보고서의 ‘합수조치’ 문건에 따르면 1980년 6월께 합수부가 검사 2명, 중앙정보부 수사관 2명 등 4명을 광주에 급파하여 5·18 수사 상황을 점검하고 정책 사안을 건의하도록 했다. 구체적인 조치 내용은 ‘광주사태 처리 방향 검토보고(합수본부장)’로 기술돼 있다. 광주에 파견한 4명의 검토 내용은 이렇다. ‘첫째, 5·17 이전 계열과 5·22 이후 홍남순 계열 연결 문제. 둘째, 5·17 이전 행위의 내란공모 내용 확정. 셋째, 5·22 이후의 소요에서 내란으로 변신 시기. 넷째, 김대중과 광주사태 연결’ 등을 합수본부장 전두환에게 보고한다. 그다음에 기술된 건의 내용은 더욱 경악케 한다. 합수본부장에게 보고한 시점이 5·18 재판이 열리기 전인 80년 7월1일이기 때문이다. 건의 내용은 이렇다. ‘첫째, 내란 또는 소요죄 제기 여부는 정책적 결정, 단 광주시민은 김대중이 내란 수괴라야 납득. 둘째, 처벌 범위 500명 정도로 결정. 셋째, 주요 임무 수행자 30~40명을 극형 처단이라고 밝히면서 광주사태 수습 위원회의 해산까지 건의’하고 있다. 특히 합수본부장의 지시 내용은 당시 수사와 재판을 받은 피해자, 관련자라면 전율을 느낄 정도다. 당시 수사를 담당한 전남합수단에 ‘피의자 정동년의 피의자 심문 조서에 김대중과 관련 내용을 포함하도록 지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연 지시자는 누구인가. 보고받은 합수본부장이 전두환 자신은 아니고 아래에서 알아서 처리한 것이라고 또다시 억지를 부릴 것인가. 그렇다면 그는 광주항쟁 진압 결과를 활용한 기회주의자인가. 이어지는 지시 내용은 더욱 참담하다. ‘피의자(정동년)가 바라는 전남대 학생운동 방향과 목표를 1) 대규모 폭력 사태 유발 및 전국적 민중봉기로 현 정부 퇴진 2) 김대중을 추대하여 새로운 체제 구축을 하기 위해 80년 5월5일 김대중가에서 김대중에게 위 방향을 설명 후 자금 요청한 사실과 500만원 수수한 사실 3) 피의자(정동년) 지시에 의거, 박관현 등이 전남대 시위를 주동한 사실’ 등을 공소장에 포함하도록 보안사가 주축이 된 전남합수단에 지시하고 있다. 당시 이와 같은 지시의 최종 결정권자는 누구인가. 합수본부장 전두환이다. 죽기 전에 전씨는 이에 대해 답해야 한다. 당시 5·18 재판은 시민학생수습위원회, 도청(항쟁)지도부, 기동타격대, 학원팀, 기타 등 5개팀으로 구분돼 재판이 진행됐다. 특히 학원팀의 공소장 첫머리는 천편일률적으로 이렇게 시작된다. “피고인 ○○○은 평소 유신 체제에 불만을 품어 오던 중, 평소 존경해온 김대중을 대통령으로 옹립할 목적으로”라고 기술되고 있다. 전씨 등 신군부가 광주의 항쟁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군사적으로 지시하고 사법적으로 조정하여 제5공화국을 출범시키기까지 5월 광주는 처절한 희생양이었다. 전씨는 이제 그 수괴임을 국민 앞에 밝혀야 한다. 당시 필자는 재판정에서 내란 수괴에 대한 국내 판례가 없어 일본의 판례를 인용하여 항의한 바 있다. 일반적으로 내란 수괴라 함은 내란의 전반을 기획하고 현장에서 실제적 지휘 책임을 맡아야 함에도 정동년씨는 항쟁 기획에 참여한 바 없으며 5·17 예비검속되어 5월18일 현장에 없었음을 강조했지만 정치재판으로 끝났다. 전씨는 결국 5·18 진압, 재판 조작과 왜곡의 운전사였다. 지금 전국에서 <택시운전사>가 그 금기의 빗장을 열고 있다. 망월 묘역에 머리카락과 손톱을 묻은 고마운 힌츠페터는 승리하는 5·18 담론의 열쇠를 우리에게 남기고 떠났다. 힌츠페터를 태운 택시운전사 김사복씨는 지금 어디에 계시는가, 우리 모두 그를 기다리고 있다.
왜냐면 |
[왜냐면] 전두환과 택시운전사 / 송선태 |
송선태
5·18 기념재단 전 상임이사 5·18 민주화운동을 담은 영화 <택시운전사>가 1천만 관객을 돌파했다. 전두환의 회고록은 법원에 의해 5·18 민주화운동을 왜곡한 사실이 인정되어 출판과 배포가 금지되었으나 여전히 인터넷과 동네 서점에서 팔리거나 진열되고 있다. 그동안 5·18 가해자와 옹호자 쪽이 제기하는 5·18 논쟁은 왜곡 담론을 벗어나지 못한 채 반복되고 있지만, <택시운전사>에 쏠리는 대중의 폭발적 관심은 5·18에 대한 사회적 태도를 방증한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사법적 판결과 제도적 기념사업이 추진되었음에도 왜곡과 폄훼의 뭇매를 맞아온 5·18의 역사적 진실을 바로 세우라는 국민적 요구로 해석할 수 있다. 영화는 5·18 담론에 대해 하버마스의 지적처럼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논증이 이루어져 왔는지를 우리의 역사와 국민에게 묻고 있다. 동시에 영화에 대한 뜨거운 호응은 5·18에 대한 국민의 보편적 역사인식이 중대한 변곡점에 도달해 있음을 웅변하고 있다. 그간 5·18 담론은 해결 담론과 실천 담론의 형태로 전개되어 왔다. 우선 해결 담론은 비극적 사태 담론, 진상규명 담론, 명예회복 담론, 역사심판 담론, 적극적 처벌 담론, 명예회복 및 기념사업 담론 등의 단계를 거쳐왔다. 국제법적 지위를 가진 광주 문제 해결 5원칙 즉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명예회복, 적절한 배상, 기념사업 등의 각 단계마다 해결 방안을 놓고 갈등과 논쟁이 거듭됐다. 실천 담론은 역사규정 담론, 왜곡 담론, 인권 담론, 문화 담론 등으로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폭넓은 담론을 제공해 왔다. 그럼에도 전두환 등 신군부 쪽 인사들과 그 추종 세력들의 증언과 회고록 등은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역사적 의의는 물론 사건의 원인과 경과에 대해 철저하게 실체적 진실을 부인하는 데 앞장서 왔다. 가해자 쪽의 목표는 모든 논쟁을 왜곡 담론의 울타리 안에 가두어 진실 공방을 지속시키려는 일방통행식 주장의 반복이다. 여기에 동조 세력의 동원 담론이 가세하고 있다. 그들은 역사 정의 담론으로 민심의 이행을 막으려는 반이성적 행태를 보이고 있다. 결국 이들의 왜곡 담론은 구국의 결단이라는 그들의 쿠데타 행위마저 부정하는 오류에 빠지고 말았다. 북한군 특수부대 600여명이 광주학살 주범이라는 주장이 그것이다. 어디로 침투해서 어디로 퇴각했는지에 대한 탈북민들의 증언이 있지만 신뢰할 만한 수준은 아니다. 모두 몇 단계를 거쳐 들은 전언에 불과하다. 또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모두 죽었다고 한다. 일부는 국립5·18민주묘지의 무명열사 묘역에 잠들어 있다고 주장한다. 5명의 무명열사 가운데 6살 어린이도 있다. 만보를 양보해 이들이 침투했다면 광주 진압은 남북한 특수부대의 합작품이고 남한의 신군부는 이적행위, 반역행위를 통해 집권했다는 지적에 어떻게 답할 것인가. 5·18 기록물 대부분이 유네스코 세계 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세계의 5·18 민주화운동으로 자리매김되었어도 저들은 제2의 학살극을 멈추지 않고 있다. 전두환은 당시 행적에 대해 신군부 특히 5·18 진압군을 지휘할 위치에 있지 않았고 발포명령을 내린 바 없다고 일관되게 발뺌하고 있다. 전씨는 당시 보안사령관, 중앙정보부장 서리, 박정희 시해사건 합동수사본부장을 겸임하고 있었다. 2007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의 최종 보고서는 그 부록에서 전두환의 5·18 사건 처리와 관련한 지시 내용을 상세히 실었다. 보고서의 ‘합수조치’ 문건에 따르면 1980년 6월께 합수부가 검사 2명, 중앙정보부 수사관 2명 등 4명을 광주에 급파하여 5·18 수사 상황을 점검하고 정책 사안을 건의하도록 했다. 구체적인 조치 내용은 ‘광주사태 처리 방향 검토보고(합수본부장)’로 기술돼 있다. 광주에 파견한 4명의 검토 내용은 이렇다. ‘첫째, 5·17 이전 계열과 5·22 이후 홍남순 계열 연결 문제. 둘째, 5·17 이전 행위의 내란공모 내용 확정. 셋째, 5·22 이후의 소요에서 내란으로 변신 시기. 넷째, 김대중과 광주사태 연결’ 등을 합수본부장 전두환에게 보고한다. 그다음에 기술된 건의 내용은 더욱 경악케 한다. 합수본부장에게 보고한 시점이 5·18 재판이 열리기 전인 80년 7월1일이기 때문이다. 건의 내용은 이렇다. ‘첫째, 내란 또는 소요죄 제기 여부는 정책적 결정, 단 광주시민은 김대중이 내란 수괴라야 납득. 둘째, 처벌 범위 500명 정도로 결정. 셋째, 주요 임무 수행자 30~40명을 극형 처단이라고 밝히면서 광주사태 수습 위원회의 해산까지 건의’하고 있다. 특히 합수본부장의 지시 내용은 당시 수사와 재판을 받은 피해자, 관련자라면 전율을 느낄 정도다. 당시 수사를 담당한 전남합수단에 ‘피의자 정동년의 피의자 심문 조서에 김대중과 관련 내용을 포함하도록 지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연 지시자는 누구인가. 보고받은 합수본부장이 전두환 자신은 아니고 아래에서 알아서 처리한 것이라고 또다시 억지를 부릴 것인가. 그렇다면 그는 광주항쟁 진압 결과를 활용한 기회주의자인가. 이어지는 지시 내용은 더욱 참담하다. ‘피의자(정동년)가 바라는 전남대 학생운동 방향과 목표를 1) 대규모 폭력 사태 유발 및 전국적 민중봉기로 현 정부 퇴진 2) 김대중을 추대하여 새로운 체제 구축을 하기 위해 80년 5월5일 김대중가에서 김대중에게 위 방향을 설명 후 자금 요청한 사실과 500만원 수수한 사실 3) 피의자(정동년) 지시에 의거, 박관현 등이 전남대 시위를 주동한 사실’ 등을 공소장에 포함하도록 보안사가 주축이 된 전남합수단에 지시하고 있다. 당시 이와 같은 지시의 최종 결정권자는 누구인가. 합수본부장 전두환이다. 죽기 전에 전씨는 이에 대해 답해야 한다. 당시 5·18 재판은 시민학생수습위원회, 도청(항쟁)지도부, 기동타격대, 학원팀, 기타 등 5개팀으로 구분돼 재판이 진행됐다. 특히 학원팀의 공소장 첫머리는 천편일률적으로 이렇게 시작된다. “피고인 ○○○은 평소 유신 체제에 불만을 품어 오던 중, 평소 존경해온 김대중을 대통령으로 옹립할 목적으로”라고 기술되고 있다. 전씨 등 신군부가 광주의 항쟁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군사적으로 지시하고 사법적으로 조정하여 제5공화국을 출범시키기까지 5월 광주는 처절한 희생양이었다. 전씨는 이제 그 수괴임을 국민 앞에 밝혀야 한다. 당시 필자는 재판정에서 내란 수괴에 대한 국내 판례가 없어 일본의 판례를 인용하여 항의한 바 있다. 일반적으로 내란 수괴라 함은 내란의 전반을 기획하고 현장에서 실제적 지휘 책임을 맡아야 함에도 정동년씨는 항쟁 기획에 참여한 바 없으며 5·17 예비검속되어 5월18일 현장에 없었음을 강조했지만 정치재판으로 끝났다. 전씨는 결국 5·18 진압, 재판 조작과 왜곡의 운전사였다. 지금 전국에서 <택시운전사>가 그 금기의 빗장을 열고 있다. 망월 묘역에 머리카락과 손톱을 묻은 고마운 힌츠페터는 승리하는 5·18 담론의 열쇠를 우리에게 남기고 떠났다. 힌츠페터를 태운 택시운전사 김사복씨는 지금 어디에 계시는가, 우리 모두 그를 기다리고 있다.
5·18 기념재단 전 상임이사 5·18 민주화운동을 담은 영화 <택시운전사>가 1천만 관객을 돌파했다. 전두환의 회고록은 법원에 의해 5·18 민주화운동을 왜곡한 사실이 인정되어 출판과 배포가 금지되었으나 여전히 인터넷과 동네 서점에서 팔리거나 진열되고 있다. 그동안 5·18 가해자와 옹호자 쪽이 제기하는 5·18 논쟁은 왜곡 담론을 벗어나지 못한 채 반복되고 있지만, <택시운전사>에 쏠리는 대중의 폭발적 관심은 5·18에 대한 사회적 태도를 방증한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사법적 판결과 제도적 기념사업이 추진되었음에도 왜곡과 폄훼의 뭇매를 맞아온 5·18의 역사적 진실을 바로 세우라는 국민적 요구로 해석할 수 있다. 영화는 5·18 담론에 대해 하버마스의 지적처럼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논증이 이루어져 왔는지를 우리의 역사와 국민에게 묻고 있다. 동시에 영화에 대한 뜨거운 호응은 5·18에 대한 국민의 보편적 역사인식이 중대한 변곡점에 도달해 있음을 웅변하고 있다. 그간 5·18 담론은 해결 담론과 실천 담론의 형태로 전개되어 왔다. 우선 해결 담론은 비극적 사태 담론, 진상규명 담론, 명예회복 담론, 역사심판 담론, 적극적 처벌 담론, 명예회복 및 기념사업 담론 등의 단계를 거쳐왔다. 국제법적 지위를 가진 광주 문제 해결 5원칙 즉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명예회복, 적절한 배상, 기념사업 등의 각 단계마다 해결 방안을 놓고 갈등과 논쟁이 거듭됐다. 실천 담론은 역사규정 담론, 왜곡 담론, 인권 담론, 문화 담론 등으로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폭넓은 담론을 제공해 왔다. 그럼에도 전두환 등 신군부 쪽 인사들과 그 추종 세력들의 증언과 회고록 등은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역사적 의의는 물론 사건의 원인과 경과에 대해 철저하게 실체적 진실을 부인하는 데 앞장서 왔다. 가해자 쪽의 목표는 모든 논쟁을 왜곡 담론의 울타리 안에 가두어 진실 공방을 지속시키려는 일방통행식 주장의 반복이다. 여기에 동조 세력의 동원 담론이 가세하고 있다. 그들은 역사 정의 담론으로 민심의 이행을 막으려는 반이성적 행태를 보이고 있다. 결국 이들의 왜곡 담론은 구국의 결단이라는 그들의 쿠데타 행위마저 부정하는 오류에 빠지고 말았다. 북한군 특수부대 600여명이 광주학살 주범이라는 주장이 그것이다. 어디로 침투해서 어디로 퇴각했는지에 대한 탈북민들의 증언이 있지만 신뢰할 만한 수준은 아니다. 모두 몇 단계를 거쳐 들은 전언에 불과하다. 또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모두 죽었다고 한다. 일부는 국립5·18민주묘지의 무명열사 묘역에 잠들어 있다고 주장한다. 5명의 무명열사 가운데 6살 어린이도 있다. 만보를 양보해 이들이 침투했다면 광주 진압은 남북한 특수부대의 합작품이고 남한의 신군부는 이적행위, 반역행위를 통해 집권했다는 지적에 어떻게 답할 것인가. 5·18 기록물 대부분이 유네스코 세계 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세계의 5·18 민주화운동으로 자리매김되었어도 저들은 제2의 학살극을 멈추지 않고 있다. 전두환은 당시 행적에 대해 신군부 특히 5·18 진압군을 지휘할 위치에 있지 않았고 발포명령을 내린 바 없다고 일관되게 발뺌하고 있다. 전씨는 당시 보안사령관, 중앙정보부장 서리, 박정희 시해사건 합동수사본부장을 겸임하고 있었다. 2007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의 최종 보고서는 그 부록에서 전두환의 5·18 사건 처리와 관련한 지시 내용을 상세히 실었다. 보고서의 ‘합수조치’ 문건에 따르면 1980년 6월께 합수부가 검사 2명, 중앙정보부 수사관 2명 등 4명을 광주에 급파하여 5·18 수사 상황을 점검하고 정책 사안을 건의하도록 했다. 구체적인 조치 내용은 ‘광주사태 처리 방향 검토보고(합수본부장)’로 기술돼 있다. 광주에 파견한 4명의 검토 내용은 이렇다. ‘첫째, 5·17 이전 계열과 5·22 이후 홍남순 계열 연결 문제. 둘째, 5·17 이전 행위의 내란공모 내용 확정. 셋째, 5·22 이후의 소요에서 내란으로 변신 시기. 넷째, 김대중과 광주사태 연결’ 등을 합수본부장 전두환에게 보고한다. 그다음에 기술된 건의 내용은 더욱 경악케 한다. 합수본부장에게 보고한 시점이 5·18 재판이 열리기 전인 80년 7월1일이기 때문이다. 건의 내용은 이렇다. ‘첫째, 내란 또는 소요죄 제기 여부는 정책적 결정, 단 광주시민은 김대중이 내란 수괴라야 납득. 둘째, 처벌 범위 500명 정도로 결정. 셋째, 주요 임무 수행자 30~40명을 극형 처단이라고 밝히면서 광주사태 수습 위원회의 해산까지 건의’하고 있다. 특히 합수본부장의 지시 내용은 당시 수사와 재판을 받은 피해자, 관련자라면 전율을 느낄 정도다. 당시 수사를 담당한 전남합수단에 ‘피의자 정동년의 피의자 심문 조서에 김대중과 관련 내용을 포함하도록 지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연 지시자는 누구인가. 보고받은 합수본부장이 전두환 자신은 아니고 아래에서 알아서 처리한 것이라고 또다시 억지를 부릴 것인가. 그렇다면 그는 광주항쟁 진압 결과를 활용한 기회주의자인가. 이어지는 지시 내용은 더욱 참담하다. ‘피의자(정동년)가 바라는 전남대 학생운동 방향과 목표를 1) 대규모 폭력 사태 유발 및 전국적 민중봉기로 현 정부 퇴진 2) 김대중을 추대하여 새로운 체제 구축을 하기 위해 80년 5월5일 김대중가에서 김대중에게 위 방향을 설명 후 자금 요청한 사실과 500만원 수수한 사실 3) 피의자(정동년) 지시에 의거, 박관현 등이 전남대 시위를 주동한 사실’ 등을 공소장에 포함하도록 보안사가 주축이 된 전남합수단에 지시하고 있다. 당시 이와 같은 지시의 최종 결정권자는 누구인가. 합수본부장 전두환이다. 죽기 전에 전씨는 이에 대해 답해야 한다. 당시 5·18 재판은 시민학생수습위원회, 도청(항쟁)지도부, 기동타격대, 학원팀, 기타 등 5개팀으로 구분돼 재판이 진행됐다. 특히 학원팀의 공소장 첫머리는 천편일률적으로 이렇게 시작된다. “피고인 ○○○은 평소 유신 체제에 불만을 품어 오던 중, 평소 존경해온 김대중을 대통령으로 옹립할 목적으로”라고 기술되고 있다. 전씨 등 신군부가 광주의 항쟁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군사적으로 지시하고 사법적으로 조정하여 제5공화국을 출범시키기까지 5월 광주는 처절한 희생양이었다. 전씨는 이제 그 수괴임을 국민 앞에 밝혀야 한다. 당시 필자는 재판정에서 내란 수괴에 대한 국내 판례가 없어 일본의 판례를 인용하여 항의한 바 있다. 일반적으로 내란 수괴라 함은 내란의 전반을 기획하고 현장에서 실제적 지휘 책임을 맡아야 함에도 정동년씨는 항쟁 기획에 참여한 바 없으며 5·17 예비검속되어 5월18일 현장에 없었음을 강조했지만 정치재판으로 끝났다. 전씨는 결국 5·18 진압, 재판 조작과 왜곡의 운전사였다. 지금 전국에서 <택시운전사>가 그 금기의 빗장을 열고 있다. 망월 묘역에 머리카락과 손톱을 묻은 고마운 힌츠페터는 승리하는 5·18 담론의 열쇠를 우리에게 남기고 떠났다. 힌츠페터를 태운 택시운전사 김사복씨는 지금 어디에 계시는가, 우리 모두 그를 기다리고 있다.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