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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8.07 18:31 수정 : 2017.08.07 19:08

김동령
<거미의 땅> 감독

마지막까지 목포신항에서 세월호를 촬영하던 다큐멘터리 감독 고 박종필을 추모하며 그의 주요 작품 5편이 유튜브에서 상영중이다. (1999), <장애인 이동권 투쟁보고서: 버스를 타자!>(2002), <노들바람>(2003), <4·16프로젝트 ‘망각과 기억’-인양>(2016), <망각과 기억2: 돌아 봄-잠수사>(2017)가 8월8일까지 다시보기라는 이름으로 상영된다. 박종필 감독은 그 외에도 <끝없는 싸움: 에바다>(1999), <에바다 싸움 6년: 해 아래 모든 이의 평등을 위해>(2002), <장애인도 노동자다>(2005), <거리에서>(2007), <침묵을 깨고>(2008), <해피투게더는 행복의 시작이다>(2009), <시설 장애인의 역습>(2010). <장애운동 10년사-투쟁없이 쟁취없다!>(2012), <극중극>(2012), <발달장애인법 제정하라!>(2013)와 같은 작품을 연출했으며, 수많은 현장에서 영상 기록을 담당했고 행사 영상을 만들었다. 나는 그것을 기억하고 싶다. 그래서 태준식 감독의 칼럼 ‘또 다른 박종필들’(한겨레 시론 8월1일치)에 이어서 쓴다.

박종필 감독의 영화 속에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소외되고 차별받는 사람들의 몸짓과 소리가 등장한다. 대중 미디어와 상업영화에도 이들이 가끔 등장하지만 대부분 동정을 유발하는 애처로운 대상으로서 그려진다면, 박종필 감독의 영상에는 이들이 투쟁하는 이미지, 권력과 불협화음을 일으키는 소리로 등장한다. 이들이 일으키는 소음과 합의되지 않은 어두운 이미지들은 민중의 자기 고통의 표현이라는 존엄성으로 승화된다. 박종필 감독의 엄격하고 뛰어난 촬영과 시적인 영상에 기록된 대상과 사건은, ‘소비’를 통해 포용 가능한 것으로서가 아니라, ‘저 너머’를 상상할 수 있는 다른 사고와 풍경을 제공한다.

지금까지 한국의 역사는 언제나 승리한 자들의 기억으로 구성되거나, 승리에 동원된 사람들의 매스게임과 같은 풍경으로 만들어졌다. 가끔 밑바닥 민중들의 삶이 노출되지만 대중과 합의 가능한 안전한 선에서 허용될 뿐, 이름 없는 자들의 기억은 공식기억에서 배제된 ‘비주류 기록물’에 한정되었다. ‘상품’으로 인정받지 못하면, 대중의 관심사에서 소외되는 미디어 환경 속에 존재해온 것이다. 그렇게 역사의 기억은 망각을 통해 합의된다. 피해자는 사라지고 가해자가 누군지 모른 채 살아온 것이 지금껏 한국 현대사가 만들어온 세계였다. 만약 앞으로도 승자의 기억만이 주류 미디어를 통해 삶의 진실로 재현된다면, 그것이 국가의 공식 기록이 된다면, 앞으로 다가올 세계 또한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박종필 감독을 포함해 많은 독립다큐멘터리 감독들은 1980년대 이후 다양한 현장 속에서 민중의 미시사를 기록하고 새로운 영화를 생산해 왔다. 그런데 왜 그들은 모래알같이 흩어져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한 채 소리 없이 무너지고 있는가? 왜 이들의 작품은 그토록 찾아보기 어렵고, 거리에서, 현장에서 카메라를 들고 고군분투하는 감독들은 극도의 빈곤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자기 살을 깎아먹으며 활동하고 있는가? 독립다큐멘터리를 하는 것의 유일한 장점은 은퇴 없이 평생 꾸준히 할 수 있다는 것인데 왜 우리는 박종필 감독을 고작 만 49살의 나이에 떠나보내게 되었는가?

80년대 민주화 투쟁을 거치고 풀뿌리 민주주의에서 태동한 독립영화 공동체는 한국 사회의 고유한 특성이었다. 그동안 영상미디어센터인 미디액트와 시민방송 <아르티브이>(RTV)와 같은 형태로 자생적인 제작·배급·교육기관을 만들어왔으나, 반민주적 정권은 이를 처참히 무너뜨리고 유명무실하게 만들었다. 그 외에도 독립영화전용관이나 독립영화제도 탄압 속에서 기적처럼 독립영화인과 시민들의 힘으로 간신히 유지되었다. 지원이 끊긴 영화제가 미련없이 사라졌던 것에 비해 인디다큐페스티벌과 인디포럼 같은 독립영화제의 생존은 그들이 만들어온 역사성을 반증하는 현장이다.

하지만 엄혹한 정치적 검열 속에서 독립다큐들은 ‘시장’에서 살아남기를 강요받아왔다. 자신이 촬영한 대상에 대한 존엄성과 촬영윤리를 고민하는 대신 멋들어진 트레일러를 만들어 상품으로서 팔기를 강요받아왔다. 독립영화는 사실 시장과 거리가 먼 예술이다. 하지만 신자유주의의 흐름에 맞춰 독립다큐 감독들마저 시장에서 생존이 목적이 되어왔다. 거대 방송사의 갑질과 횡포에 맞서는 독립외주제작 피디(PD)들 또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들은 방송사의 저작권 갑질 속에서 하청 노동자로 생존해 왔다. 다큐멘터리의 시장이 필요하다면 이제는 창작자들이 아닌 방송사들이 좋은 작품을 사기 위해 경쟁해야 한다. 공정한 시장의 전제는 경쟁의 주체가 달라져야 하는 데 있다. 이렇게 독립영화는 구조적인 문제로 봐야 한다. 그렇지 않고 여전히 생존 문제로 한정한다면, 독립다큐멘터리 감독들의 분투는 개인적인 비극으로 축소될 것이다.

그러나 다시 묻고 싶다.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기록이란 무엇인가. 어떤 기억을 만들어 가야 할까? 이곳에서 영화는 무슨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그 질문에 대한 응답은 부지런히 만들어지고 있다. 그러나 아직 다 못 핀 미래의 작품들과 담론들은 고사당할 위기이다. 독립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있는 감독과 영상 활동가를 문화예술인으로서, 미시적인 기억을 만드는 사회적 노동자로서 인정하지 않으면 우리는 세계에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독립영화라는 독특한 전통, 귀중한 문화유산을 영영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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