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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7.31 18:02 수정 : 2017.07.31 19:08

왕현종
연세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전봉준 장군은 한국 근대사에서 전환점을 이루는 동학농민혁명의 상징적인 인물이다. 동학농민군은 1894년 봄 폐정개혁을 기치로 전라도에서 봉기하였고, 그해 10월 일본군의 조선 침략에 대항하여 경상, 충청, 강원, 황해도 등 각지로 확대되었다.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을 맞아 사회개혁과 반침략운동의 의미가 널리 부각되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서울에 그 역사적 의미를 기리는 기념물이 전무한 형편이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동학농민혁명은 오랫동안 역사교과서에서 호남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축소·서술되고 있기 때문이다.
원본크기 11×15㎝, 촬영자 무라카미 덴신(村上天眞), 일시 1895년 2월 27일(『사진화보(???報)』 제14권, 춘양당(春陽堂), 1895년 5월, 김문자(金文子)『명성황후 시해와 일본인』 태학사, 2010, 번역본, 311쪽, 재인용)

전봉준은 처음부터 폐정개혁을 위해 ‘서울’로 올라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1894년 2월(양력) 고부민의 항쟁 때도 전주감영을 격파하고 서울로 간다는 목표를 세웠다. 그해 7월에 일어난 일본군의 불법적인 경복궁 점령사건과 청일전쟁 도발, 일본의 영토 위협을 국가적 위기라고 파악했다. 그래서 10월에 전국의 동학농민군을 불러일으켜 공주를 거쳐 서울로 가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그는 공주 우금치와 이후 여러 전투에서 패배해서 서울행은 좌절되었다.

1895년 전봉준은 붙잡혀서 서울로 압송되어 여러 차례 심문을 받았다. 1895년 4월23일에 임시 권설재판소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는데, 불과 몇 시간 지난 후인 다음날 오전 2시쯤 교수형에 처해졌다. 갑오개혁의 신식 재판제도 때문에 참수형은 적용하지 않았다.

전봉준은 심문과정에서 “일본군을 배격하고, 악하고 간악한 관리를 축출해서 기둥이 될 만한 선비를 세워 정치를 담당케 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다시 농민으로 되는” 것이 소원이라고 했다. 그는 외세 배격과 자주 개혁, 합의법에 의한 정치운영 등 민주주의 개혁을 주장했다. 동학농민혁명은 사회개혁과 반침략 운동이 목적인 정의로운 행동이었다.

그 바람을 이루기 위해 동학농민혁명 기념물을 서울에 세워야 한다. 가장 적절한 장소는 전봉준, 손화중, 김덕명, 최경선, 성두한 등 지도자 5명이 심문받고 처형당한 곳이다. 이들이 재판받던 법무아문 소속의 권설재판소는 의금부 위치에 있었고, 처형장인 전옥서는 종로 시전거리 아래인 종각 맞은편에 위치하였다. 전봉준 장군의 동상을 세우는 장소는 한국 근현대사의 기념비적인 공간이 될 것이다.

「조선경성도」(19세기 중기, 서울시종합자료실 소장) 그가 서울로 집중한 것은 조선왕조국가의 정치 개혁과 일본의 침략 저지를 성취하기 위해서였다.

동학농민군 지도자 전봉준 재판과 처형 장소 -권설재판소와 전옥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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