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문제연구소장 촛불이 몇만에서 230만으로 불어나던 날, 한 시민이 “보세요, 우리 민중의 저 분노와 정의감 정말 대단하지요. 하지만 박근혜를 타도한 뒤 그 부패구조를 어떻게 청산하느냐는 민중사상은 없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아니지요. 민중사상은 이론보다는 그때그때 삶과 실천으로 굽이쳐왔음을 역사는 말하고 있지요.” “그래요, 그런 역사도 있는 겁니까.” “암, 그게 바로 참역사지요.” 그러다가 사람들에 밀려 처진 뒤 지쳐 쓰러질 것 같아도 나는 잠이 안 왔다. 그래서 이 ‘버선발 이야기’를 적어 나아갔다. ‘버선발’은 남의 집 머슴인 엄마와 함께 사는 다섯 살배기 꼬마 머슴. 늘 고된 일이 괴로웠지만 “일을 해도 해도 호박 한 포기 심어 먹을 땅 한 줌을 안 주는 여기도 사람 사는 데가 엉~, 뒤집어엎어야 할 ‘얄곳’이야 이 개새끼들아”라는 엄마의 잠꼬대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래서 땅만 보면 ‘에이 나쁜 놈, 우리 엄마 괴롭히는 나쁜 새끼’ 하고 들이 밟는 걸 한 스무 해 가까이 설치다 보니 참으로 아다몰(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돌멩이를 밟아도 콩가루, 바윗돌을 밟아도 콩가루, 마침내 커단 흘떼(강)를 밟아도 쑤악하니 없어진다. 하지만 머슴은 그대로 머슴이라, 마냥 헷짓을 하고 다녔구나, 에라 죽고 말자고 마루턱에 올랐다가 퍼뜩 시껍먹고 말았다. 팔다리가 잘려나간 한 아낙이 “여보세요, 돌멩이 땅을 갈아엎고 살겠다는 사람의 땅을 빼앗고도 모자라 네 다리를 자르는 것도 사람인가요.” 그러면서 눈을 감는 것을 본 버선발은 ‘모든 건 땅 때문이구나. 그렇다면 몽땅 땅을 만들자’ 하고는 한 발을 높이 들어 꽝 하고 밟아 바다를 없앤 뒤 그 누군들 제 힘껏 달려들 가 작대기를 꽂아라, 그리하면 거기를 제 땅으로 쳐주겠다고 했다. 그러자 와~ 하고 달려가 힘 있는 것들은 그 너른 땅에 농장도 만들고 나라를 만들기도 했으나 힘이 없는 것들은 작대기 꽂을 한 뼘의 땅을 못 얻고는 도리어 버선발을 나무라는 걸 보고는 그만 털썩(실망), 비실비실 모란이(폐인)가 되었는데, 한살매(한평생) 머슴을 살았다는 한 할머니가 타이른다. 여보게, 힘꼴이나 쓰겠는데 왜 그러는가. 차라리 버선발을 한 술(번) 만나보게. 그가 어떤 치인 줄 아는가. 첫째로 둘레의 바다를 땅으로 만들었지만 제 엄마한테는 단 한뼘도 안 드리고는 몽땅 다 내준 한바탕(서사)이었다네 참짜 한바탕. 둘째로 바다를 땅으로 만듦으로써 사람이란 겉으로는 의젓해 보여도 알로는 내 거밖에 모르는 끝없는 뚱속(욕심)쟁이라는 걸 남김없이 까밝혔다네. 셋째로 남의 것을 빼앗은 것도 내 거라는 건 말짱 거짓이다. 그 거짓은 곧 막심(폭력)이라는 걸 들이대고. 넷째로 버선발은 그저 ‘다슬’이었다네. 무슨 말이냐. 땀을 흘려보면 땀은 땅에 떨어지면 한줌 거름이지 네 거 내 거가 아니라는 깨우침을 뭐라고 하는 줄 아는가. 그걸 ‘다슬’이라고 했으니 그런 버선발을 한 술(번) 만나보라니까. 그는 털팡(실패)한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깜떼(절망)에 빠졌을까. 아니라네. 그러면 자비에서 뜻을 얻고 있을까. 아니다. 그럼 사랑에서 얻고 있을까. 어림없는 소리. 사랑이란 낱말을 들어보지도 못했는데. 그러면 버선발의 다슬은 어디서 나왔을까. 거듭 밝히지만 다슬이란 땀의 일나(노동)에서 영글어 오늘의 이 자본주의 문명의 어두운 그늘을 찢고 나올 새뜸(새소식)이 아닐까. 나는 이 버선발 이야기 원고를 끼고 앉아 있지는 않을 것이다. 꼭 읽어보겠다는 사람, 촛불시민들 가운데 한 서른 사람한테 이 원고를 띄워주고 싶다. 어떤 반응인가도 기다려보고 싶다.
왜냐면 |
[왜냐면] 민중사상의 실체를 들이대노라 -버선발 이야기 / 백기완 |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촛불이 몇만에서 230만으로 불어나던 날, 한 시민이 “보세요, 우리 민중의 저 분노와 정의감 정말 대단하지요. 하지만 박근혜를 타도한 뒤 그 부패구조를 어떻게 청산하느냐는 민중사상은 없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아니지요. 민중사상은 이론보다는 그때그때 삶과 실천으로 굽이쳐왔음을 역사는 말하고 있지요.” “그래요, 그런 역사도 있는 겁니까.” “암, 그게 바로 참역사지요.” 그러다가 사람들에 밀려 처진 뒤 지쳐 쓰러질 것 같아도 나는 잠이 안 왔다. 그래서 이 ‘버선발 이야기’를 적어 나아갔다. ‘버선발’은 남의 집 머슴인 엄마와 함께 사는 다섯 살배기 꼬마 머슴. 늘 고된 일이 괴로웠지만 “일을 해도 해도 호박 한 포기 심어 먹을 땅 한 줌을 안 주는 여기도 사람 사는 데가 엉~, 뒤집어엎어야 할 ‘얄곳’이야 이 개새끼들아”라는 엄마의 잠꼬대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래서 땅만 보면 ‘에이 나쁜 놈, 우리 엄마 괴롭히는 나쁜 새끼’ 하고 들이 밟는 걸 한 스무 해 가까이 설치다 보니 참으로 아다몰(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돌멩이를 밟아도 콩가루, 바윗돌을 밟아도 콩가루, 마침내 커단 흘떼(강)를 밟아도 쑤악하니 없어진다. 하지만 머슴은 그대로 머슴이라, 마냥 헷짓을 하고 다녔구나, 에라 죽고 말자고 마루턱에 올랐다가 퍼뜩 시껍먹고 말았다. 팔다리가 잘려나간 한 아낙이 “여보세요, 돌멩이 땅을 갈아엎고 살겠다는 사람의 땅을 빼앗고도 모자라 네 다리를 자르는 것도 사람인가요.” 그러면서 눈을 감는 것을 본 버선발은 ‘모든 건 땅 때문이구나. 그렇다면 몽땅 땅을 만들자’ 하고는 한 발을 높이 들어 꽝 하고 밟아 바다를 없앤 뒤 그 누군들 제 힘껏 달려들 가 작대기를 꽂아라, 그리하면 거기를 제 땅으로 쳐주겠다고 했다. 그러자 와~ 하고 달려가 힘 있는 것들은 그 너른 땅에 농장도 만들고 나라를 만들기도 했으나 힘이 없는 것들은 작대기 꽂을 한 뼘의 땅을 못 얻고는 도리어 버선발을 나무라는 걸 보고는 그만 털썩(실망), 비실비실 모란이(폐인)가 되었는데, 한살매(한평생) 머슴을 살았다는 한 할머니가 타이른다. 여보게, 힘꼴이나 쓰겠는데 왜 그러는가. 차라리 버선발을 한 술(번) 만나보게. 그가 어떤 치인 줄 아는가. 첫째로 둘레의 바다를 땅으로 만들었지만 제 엄마한테는 단 한뼘도 안 드리고는 몽땅 다 내준 한바탕(서사)이었다네 참짜 한바탕. 둘째로 바다를 땅으로 만듦으로써 사람이란 겉으로는 의젓해 보여도 알로는 내 거밖에 모르는 끝없는 뚱속(욕심)쟁이라는 걸 남김없이 까밝혔다네. 셋째로 남의 것을 빼앗은 것도 내 거라는 건 말짱 거짓이다. 그 거짓은 곧 막심(폭력)이라는 걸 들이대고. 넷째로 버선발은 그저 ‘다슬’이었다네. 무슨 말이냐. 땀을 흘려보면 땀은 땅에 떨어지면 한줌 거름이지 네 거 내 거가 아니라는 깨우침을 뭐라고 하는 줄 아는가. 그걸 ‘다슬’이라고 했으니 그런 버선발을 한 술(번) 만나보라니까. 그는 털팡(실패)한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깜떼(절망)에 빠졌을까. 아니라네. 그러면 자비에서 뜻을 얻고 있을까. 아니다. 그럼 사랑에서 얻고 있을까. 어림없는 소리. 사랑이란 낱말을 들어보지도 못했는데. 그러면 버선발의 다슬은 어디서 나왔을까. 거듭 밝히지만 다슬이란 땀의 일나(노동)에서 영글어 오늘의 이 자본주의 문명의 어두운 그늘을 찢고 나올 새뜸(새소식)이 아닐까. 나는 이 버선발 이야기 원고를 끼고 앉아 있지는 않을 것이다. 꼭 읽어보겠다는 사람, 촛불시민들 가운데 한 서른 사람한테 이 원고를 띄워주고 싶다. 어떤 반응인가도 기다려보고 싶다.
통일문제연구소장 촛불이 몇만에서 230만으로 불어나던 날, 한 시민이 “보세요, 우리 민중의 저 분노와 정의감 정말 대단하지요. 하지만 박근혜를 타도한 뒤 그 부패구조를 어떻게 청산하느냐는 민중사상은 없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아니지요. 민중사상은 이론보다는 그때그때 삶과 실천으로 굽이쳐왔음을 역사는 말하고 있지요.” “그래요, 그런 역사도 있는 겁니까.” “암, 그게 바로 참역사지요.” 그러다가 사람들에 밀려 처진 뒤 지쳐 쓰러질 것 같아도 나는 잠이 안 왔다. 그래서 이 ‘버선발 이야기’를 적어 나아갔다. ‘버선발’은 남의 집 머슴인 엄마와 함께 사는 다섯 살배기 꼬마 머슴. 늘 고된 일이 괴로웠지만 “일을 해도 해도 호박 한 포기 심어 먹을 땅 한 줌을 안 주는 여기도 사람 사는 데가 엉~, 뒤집어엎어야 할 ‘얄곳’이야 이 개새끼들아”라는 엄마의 잠꼬대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래서 땅만 보면 ‘에이 나쁜 놈, 우리 엄마 괴롭히는 나쁜 새끼’ 하고 들이 밟는 걸 한 스무 해 가까이 설치다 보니 참으로 아다몰(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돌멩이를 밟아도 콩가루, 바윗돌을 밟아도 콩가루, 마침내 커단 흘떼(강)를 밟아도 쑤악하니 없어진다. 하지만 머슴은 그대로 머슴이라, 마냥 헷짓을 하고 다녔구나, 에라 죽고 말자고 마루턱에 올랐다가 퍼뜩 시껍먹고 말았다. 팔다리가 잘려나간 한 아낙이 “여보세요, 돌멩이 땅을 갈아엎고 살겠다는 사람의 땅을 빼앗고도 모자라 네 다리를 자르는 것도 사람인가요.” 그러면서 눈을 감는 것을 본 버선발은 ‘모든 건 땅 때문이구나. 그렇다면 몽땅 땅을 만들자’ 하고는 한 발을 높이 들어 꽝 하고 밟아 바다를 없앤 뒤 그 누군들 제 힘껏 달려들 가 작대기를 꽂아라, 그리하면 거기를 제 땅으로 쳐주겠다고 했다. 그러자 와~ 하고 달려가 힘 있는 것들은 그 너른 땅에 농장도 만들고 나라를 만들기도 했으나 힘이 없는 것들은 작대기 꽂을 한 뼘의 땅을 못 얻고는 도리어 버선발을 나무라는 걸 보고는 그만 털썩(실망), 비실비실 모란이(폐인)가 되었는데, 한살매(한평생) 머슴을 살았다는 한 할머니가 타이른다. 여보게, 힘꼴이나 쓰겠는데 왜 그러는가. 차라리 버선발을 한 술(번) 만나보게. 그가 어떤 치인 줄 아는가. 첫째로 둘레의 바다를 땅으로 만들었지만 제 엄마한테는 단 한뼘도 안 드리고는 몽땅 다 내준 한바탕(서사)이었다네 참짜 한바탕. 둘째로 바다를 땅으로 만듦으로써 사람이란 겉으로는 의젓해 보여도 알로는 내 거밖에 모르는 끝없는 뚱속(욕심)쟁이라는 걸 남김없이 까밝혔다네. 셋째로 남의 것을 빼앗은 것도 내 거라는 건 말짱 거짓이다. 그 거짓은 곧 막심(폭력)이라는 걸 들이대고. 넷째로 버선발은 그저 ‘다슬’이었다네. 무슨 말이냐. 땀을 흘려보면 땀은 땅에 떨어지면 한줌 거름이지 네 거 내 거가 아니라는 깨우침을 뭐라고 하는 줄 아는가. 그걸 ‘다슬’이라고 했으니 그런 버선발을 한 술(번) 만나보라니까. 그는 털팡(실패)한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깜떼(절망)에 빠졌을까. 아니라네. 그러면 자비에서 뜻을 얻고 있을까. 아니다. 그럼 사랑에서 얻고 있을까. 어림없는 소리. 사랑이란 낱말을 들어보지도 못했는데. 그러면 버선발의 다슬은 어디서 나왔을까. 거듭 밝히지만 다슬이란 땀의 일나(노동)에서 영글어 오늘의 이 자본주의 문명의 어두운 그늘을 찢고 나올 새뜸(새소식)이 아닐까. 나는 이 버선발 이야기 원고를 끼고 앉아 있지는 않을 것이다. 꼭 읽어보겠다는 사람, 촛불시민들 가운데 한 서른 사람한테 이 원고를 띄워주고 싶다. 어떤 반응인가도 기다려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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