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민교회 목사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5월18일 광주 민주화운동 37주년 기념식에서 희생당한 5·18 영령의 고통과 한을 어느 정도 녹여 주었다. 그러나 그날 역시 이 나라 보수당, 자유한국당 대변인은 1980년 5·18 민주화운동에 대해 “북한군”의 개입도 다시 살펴봐야 할 것이라는 논평을 냈다. 세상은 아직 바뀌지 않았고, 5·18의 한은 그대로인 것이다. 광주 5·18에 북한군이 개입한 것인가? 아니다. 절대 아니다. 나는 1976년부터 상무대에서 근무하던 군무원이었다. 5·18 당시 광주에서 거주하고 있었으며 특히 전남북 부대에 ‘화학탄’을 보급하는 업무 담당자였다. 5·18 당시 나는 주간 근무 시간에는 상무대 안에서 군대의 상황을 볼 수 있었고, 퇴근 후에는 시내를 자유롭게 다니면서 시위 상황을 볼 수 있었다. 만약 당시 북한군이 잠입해서 광주 시민을 죽였다든지, 광주 시민군과 합세하여 군인을 향해 작전을 벌였다고 한다면 당시 전혀 다른 상황이 전개되었을 것이다. 우리 군의 전혀 다른 대처가 분명히 존재했을 것이고, 그 증거는 얼마든지 남았을 것이다. 광주에 와 있던 진압군은 더더욱 힘든 상황에 직면해야 했을 것이고, 전군적인 상황으로 발전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북한군의 개입에 대한 정황도 증거도 전혀 없었다. 나는 당시 정치군인들의 반민주 반민족 반역사적인 행태에 분개하여 1982년 신학교에 들어가 공부해 목사가 됐다. 당시에 광주 시민의 강력한 저항에 부닥친 신군부는 당황했고, 시민의 시위 열기를 누그러뜨리며 외부의 합세를 막기 위해 궁여지책으로 불순한 간첩이 들어와 “독침”을 사용했다는 식으로 뉴스를 보냈지만, 그것 역시 아무 증거 없이 유야무야되고 말지 않았는가! 그러면 왜 지금도 광주 5·18에 북한을 끌어들이려는 악랄한 세력이 존재하는가? 5·18 정신을 희석시키려는 그야말로 치사하고 더러운 발상이다. 그리고 당시 자행한 신군부의 책임을 면하려는 술책에서 나온 악랄한 꼼수에 불과한 것이다. 북한군의 개입을 주장하고자 하는 사람은 분명한 증거를 내놓아야 한다. 휴전선 이북에 있는 북한군이 어느 날 어느 경로를 뚫고 국토 남부 내륙인 광주로 들어왔는지? 당시 개입했다는 북한군의 숫자가 얼마인지? 지휘관이 누군지? 그들은 구체적으로 광주의 어느 지역에 주둔했으며 어떻게 병참을 보급받았는지? 그들이 사용한 자동차나 이동수단은 무엇이었는지? 또 광주 시민 아니면 진압군으로 광주에 와 있던 군인 중 누가 어떤 피해를 보았는지? 하나라도 증거가 있다면 좋겠지만, 아니다. 당연히 아무 증거도 없고, 북한군은 개입하지 않았다. 만에 하나 북한군이 광주까지 들어왔다면 당시 이 나라 군대를 책임지고 있었던 그 군부 실세들의 책임 또한 엄청나게 크다 할 것이다. “아니면 말고 식으로” 5·18 광주 민주화운동 기간에 북한군 개입을 주장하는 것은 당시 희생당한 광주 시민과 아직도 그 아픔으로 세월을 보내는 분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짓이다. 이 나라 공당의 대표나 대변인은 자기들의 헛소리에도 결국은 책임을 져야 한다. 5·18, 아직 매듭짓지 못했다. 아직도 광주는 신군부를 지지하는 유령들과 싸우고 있다.
왜냐면 |
[왜냐면] 아직도 5·18은 계속되고 있다 / 이종학 |
이종학
복민교회 목사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5월18일 광주 민주화운동 37주년 기념식에서 희생당한 5·18 영령의 고통과 한을 어느 정도 녹여 주었다. 그러나 그날 역시 이 나라 보수당, 자유한국당 대변인은 1980년 5·18 민주화운동에 대해 “북한군”의 개입도 다시 살펴봐야 할 것이라는 논평을 냈다. 세상은 아직 바뀌지 않았고, 5·18의 한은 그대로인 것이다. 광주 5·18에 북한군이 개입한 것인가? 아니다. 절대 아니다. 나는 1976년부터 상무대에서 근무하던 군무원이었다. 5·18 당시 광주에서 거주하고 있었으며 특히 전남북 부대에 ‘화학탄’을 보급하는 업무 담당자였다. 5·18 당시 나는 주간 근무 시간에는 상무대 안에서 군대의 상황을 볼 수 있었고, 퇴근 후에는 시내를 자유롭게 다니면서 시위 상황을 볼 수 있었다. 만약 당시 북한군이 잠입해서 광주 시민을 죽였다든지, 광주 시민군과 합세하여 군인을 향해 작전을 벌였다고 한다면 당시 전혀 다른 상황이 전개되었을 것이다. 우리 군의 전혀 다른 대처가 분명히 존재했을 것이고, 그 증거는 얼마든지 남았을 것이다. 광주에 와 있던 진압군은 더더욱 힘든 상황에 직면해야 했을 것이고, 전군적인 상황으로 발전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북한군의 개입에 대한 정황도 증거도 전혀 없었다. 나는 당시 정치군인들의 반민주 반민족 반역사적인 행태에 분개하여 1982년 신학교에 들어가 공부해 목사가 됐다. 당시에 광주 시민의 강력한 저항에 부닥친 신군부는 당황했고, 시민의 시위 열기를 누그러뜨리며 외부의 합세를 막기 위해 궁여지책으로 불순한 간첩이 들어와 “독침”을 사용했다는 식으로 뉴스를 보냈지만, 그것 역시 아무 증거 없이 유야무야되고 말지 않았는가! 그러면 왜 지금도 광주 5·18에 북한을 끌어들이려는 악랄한 세력이 존재하는가? 5·18 정신을 희석시키려는 그야말로 치사하고 더러운 발상이다. 그리고 당시 자행한 신군부의 책임을 면하려는 술책에서 나온 악랄한 꼼수에 불과한 것이다. 북한군의 개입을 주장하고자 하는 사람은 분명한 증거를 내놓아야 한다. 휴전선 이북에 있는 북한군이 어느 날 어느 경로를 뚫고 국토 남부 내륙인 광주로 들어왔는지? 당시 개입했다는 북한군의 숫자가 얼마인지? 지휘관이 누군지? 그들은 구체적으로 광주의 어느 지역에 주둔했으며 어떻게 병참을 보급받았는지? 그들이 사용한 자동차나 이동수단은 무엇이었는지? 또 광주 시민 아니면 진압군으로 광주에 와 있던 군인 중 누가 어떤 피해를 보았는지? 하나라도 증거가 있다면 좋겠지만, 아니다. 당연히 아무 증거도 없고, 북한군은 개입하지 않았다. 만에 하나 북한군이 광주까지 들어왔다면 당시 이 나라 군대를 책임지고 있었던 그 군부 실세들의 책임 또한 엄청나게 크다 할 것이다. “아니면 말고 식으로” 5·18 광주 민주화운동 기간에 북한군 개입을 주장하는 것은 당시 희생당한 광주 시민과 아직도 그 아픔으로 세월을 보내는 분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짓이다. 이 나라 공당의 대표나 대변인은 자기들의 헛소리에도 결국은 책임을 져야 한다. 5·18, 아직 매듭짓지 못했다. 아직도 광주는 신군부를 지지하는 유령들과 싸우고 있다.
복민교회 목사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5월18일 광주 민주화운동 37주년 기념식에서 희생당한 5·18 영령의 고통과 한을 어느 정도 녹여 주었다. 그러나 그날 역시 이 나라 보수당, 자유한국당 대변인은 1980년 5·18 민주화운동에 대해 “북한군”의 개입도 다시 살펴봐야 할 것이라는 논평을 냈다. 세상은 아직 바뀌지 않았고, 5·18의 한은 그대로인 것이다. 광주 5·18에 북한군이 개입한 것인가? 아니다. 절대 아니다. 나는 1976년부터 상무대에서 근무하던 군무원이었다. 5·18 당시 광주에서 거주하고 있었으며 특히 전남북 부대에 ‘화학탄’을 보급하는 업무 담당자였다. 5·18 당시 나는 주간 근무 시간에는 상무대 안에서 군대의 상황을 볼 수 있었고, 퇴근 후에는 시내를 자유롭게 다니면서 시위 상황을 볼 수 있었다. 만약 당시 북한군이 잠입해서 광주 시민을 죽였다든지, 광주 시민군과 합세하여 군인을 향해 작전을 벌였다고 한다면 당시 전혀 다른 상황이 전개되었을 것이다. 우리 군의 전혀 다른 대처가 분명히 존재했을 것이고, 그 증거는 얼마든지 남았을 것이다. 광주에 와 있던 진압군은 더더욱 힘든 상황에 직면해야 했을 것이고, 전군적인 상황으로 발전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북한군의 개입에 대한 정황도 증거도 전혀 없었다. 나는 당시 정치군인들의 반민주 반민족 반역사적인 행태에 분개하여 1982년 신학교에 들어가 공부해 목사가 됐다. 당시에 광주 시민의 강력한 저항에 부닥친 신군부는 당황했고, 시민의 시위 열기를 누그러뜨리며 외부의 합세를 막기 위해 궁여지책으로 불순한 간첩이 들어와 “독침”을 사용했다는 식으로 뉴스를 보냈지만, 그것 역시 아무 증거 없이 유야무야되고 말지 않았는가! 그러면 왜 지금도 광주 5·18에 북한을 끌어들이려는 악랄한 세력이 존재하는가? 5·18 정신을 희석시키려는 그야말로 치사하고 더러운 발상이다. 그리고 당시 자행한 신군부의 책임을 면하려는 술책에서 나온 악랄한 꼼수에 불과한 것이다. 북한군의 개입을 주장하고자 하는 사람은 분명한 증거를 내놓아야 한다. 휴전선 이북에 있는 북한군이 어느 날 어느 경로를 뚫고 국토 남부 내륙인 광주로 들어왔는지? 당시 개입했다는 북한군의 숫자가 얼마인지? 지휘관이 누군지? 그들은 구체적으로 광주의 어느 지역에 주둔했으며 어떻게 병참을 보급받았는지? 그들이 사용한 자동차나 이동수단은 무엇이었는지? 또 광주 시민 아니면 진압군으로 광주에 와 있던 군인 중 누가 어떤 피해를 보았는지? 하나라도 증거가 있다면 좋겠지만, 아니다. 당연히 아무 증거도 없고, 북한군은 개입하지 않았다. 만에 하나 북한군이 광주까지 들어왔다면 당시 이 나라 군대를 책임지고 있었던 그 군부 실세들의 책임 또한 엄청나게 크다 할 것이다. “아니면 말고 식으로” 5·18 광주 민주화운동 기간에 북한군 개입을 주장하는 것은 당시 희생당한 광주 시민과 아직도 그 아픔으로 세월을 보내는 분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짓이다. 이 나라 공당의 대표나 대변인은 자기들의 헛소리에도 결국은 책임을 져야 한다. 5·18, 아직 매듭짓지 못했다. 아직도 광주는 신군부를 지지하는 유령들과 싸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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